노자 (Laotzu , 老子)

2017. 4. 26. 17:46☎순수수필작가회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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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Laotzu , 老子



출생 미상
사망 미상
국적 중국

요약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
(병). Laozi. (웨). Laotzu.


개요  

()은 이(), 이름은 이(),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생애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BC 1111~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와 덕()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사상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 (),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노자가 창시하고 장자가 발전시킨 은둔의 철학

<도덕경>의 탄생


시대BC 560 ~ BC 530경

〈도덕경〉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저술로, 도(道)를 중심으로 만물의 기원, 도덕, 정치, 철학 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저술이 노자의 실제 저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0년 후 전국 시대 때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장자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과 함께 '노장' 사상으로 불리며,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 현실 도피 사상, 은둔 사상 등 다양하게 인식되는 한편, 중국 역사상 은둔자의 철학으로 발전했다.


노자가 만년에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려 할 때 관지기 윤희가 그를 존경하여 한 권의 책을 얻고자 거듭 간청하니, 노자는 그곳에 머물면서 도를 설파하고, 단숨에 5천 자에 이르는 책을 써 주었다.


도덕경은 노자의 사상이 담겨 있는 저술로, ()를 중심으로 만물의 기원, 도덕, 정치, 철학 등의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저술이 노자의 실제 저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0년 후 전국 시대 때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했다. 장자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과 함께 '노장' 사상으로 불리며,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 현실 도피 사상, 은둔 사상 등 다양하게 인식되는 한편, 중국 역사상 은둔자의 철학으로 발전했다


노자가 만년에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려 할 때 관지기 윤희가 그를 존경하여 한 권의 책을 얻고자 거듭 간청하니, 노자는 그곳에 머물면서 도를 설파하고, 단숨에 5천 자에 이르는 책을 써 주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도덕경(道德經)이 편찬된 경위이다. 일명 노자라고도 하는 도덕경에는 도가 사상의 창시자인 노자의 모든 사상이 담겨 있다.


 도가 사상의 창시자 노자

초나라 출신인 노자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으므로 그의 생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출신으로 이름은 담(), 자는 백양(伯陽)이며 주나라 왕실의 장서 관리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생몰 연대가 불분명하고, 행적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생애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그를 노래자(老萊子), 태사담(太史儋)으로 부르기도 하며, 노자가 정치적 원인으로 노나라로 망명했을 때 당시 17세였던 공자가 그에게 주례(周禮)에 관한 질문을 했다고 하여 공자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도덕경을 전국 시대의 저술로 여기고 노자를 전국 시대 인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노자의 실재를 부정하는 학자까지 있으며, 노자에 대한 분분한 설로 인해 도덕경의 실제 저자가 노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도덕경의 저자를 노자로 보는 견해와 전국 시대의 도가 유파들이 지었다는 견해가 상존한다.

 

도덕경은 상과 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편 도경(道經)37, 하편 덕경(德經)44장으로 총 81장이다. 모든 글은 간단한 운문체로 되어 있어 의미가 다양하게 해석되며, 도교 신자들은 후에 이것을 주문으로 외우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철학적 입장에서 전략, 전술을 다루고 있다고도 본다.

 

도덕경에서 볼 수 있는 노자의 사상은 철학 사상과 정치 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노자의 철학 사상 중심에는 도()가 있다. 도덕경에서는 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이 천지의 시초이고, 이름이 있는 것이 만물의 어머니이다.

 

노자는 도를 만물의 기원으로 지칭했으며,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그것을 굳이 명명해야 한다면 ''라고 했다. 또 노자는 도를 '()'라고도 했다. 여기서 무는 존재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적인 성격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무는 절대적이고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다. 도덕경'천하 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라고 적고 있다. 노자는 무에서 유가 생성되고, 유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원리에 따라 만물이 생성되고 멸한다고 보았다. 또한 만물의 생성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불변의 법칙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원리에 따르며, 인간도 천지 만물의 구성체인 만큼 무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노자의 정치 사상이다.

 

노자는 무위를 통한 지배를 강조해 사회 진보는 혼란을 야기할 뿐이고, 생산의 발전은 인간의 탐욕을 부추길 뿐이며, 탐욕은 전쟁의 원인이라고 했다. 또한 문화는 지식의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결국 전쟁에 이용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문명이 없던 시대,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한 자연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노자의 이상적 국가 형태가 '소국과민(小國寡民)'이다. 

 

백성에게 문자 대신 새끼를 꼬아서 뜻을 전달하게 하고, 백성은 스스로 만든 음식을 맛있어 하며, 스스로 짠 옷을 입으며, 내 집에 살면서 편안함을 느끼며, 예부터 해온 것들에 만족한다. 이마에 손을 얹고 보면 이웃나라가 들어오고, 닭이 우는 소리, 멀리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어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오가는 일이 없다.

 

이처럼 인구가 적고 작은 나라가 노자의 이상국이었다. 이러한 노자의 주장은 현실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이 주장은 통치자들의 신랄한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는 크고 강한 것이 작고 약한 것을 지배하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사회였기 때문이다.

 

노자의 사상은 약 200년 후 전국 시대 장자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장자는 노자와 함께 '노장'으로 불리는 도가의 대표 사상가로, 그의 일생에 대해 알려진 바는 적으나 저서인 장자는 도가의 핵심 경전으로 유명하다. 장자는 총 33편이 전해지며, 크게 내편, 외편, 잡편으로 나누어진다. 장자는 우언 형식을 띤 글들이 대부분이며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력이 우수하여 문학책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도교 스승들이 황제에게 도덕경을 바치는 모습  

도가 사상은 한나라 시대에는 황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군사에 적용되었으며, 일부는 후한 시대에 도교로 발전했다.


장자 역시 도를 우주 만물의 원천이라 여겨 장자'도란 무엇인가? 그 어떤 것에서도 생겨나지 않으며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아서 그 자체가 근원적인 존재이며, 하늘과 땅이 열리기 전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라고 기술했다. 장자는 인위가 세상 모든 싸움의 원인임을 지적하고, 언어와 지식을 부정했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관과 판단을 거부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잊고 천지 만물과 혼연일체를 이룰 것을 주장했다. 이를 이룬 자를 지인(至人)이라 일컬었으며, 지인만이 절대 자유의 세상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도교로 발전한 도가 사상 

노자의 사상은 도덕경을 기반으로 하여 도교로 발전했다.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 사상은 자유를 추구했다. 자유는 절대적이며, 누구라도 도를 깨닫기만 하면 절대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도가 사상은 절대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현실 도피 사상', '은둔의 사상'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따라서 도가 사상은 중국 역사 속에서 귀족과 지식인들에게는 패배자, 은둔자의 철학으로 여겨지며 발전했고, 어렵고 추상적인 면이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종교를 떠올리게 했다.

 

도가 사상은 한()나라의 개국과 함께 위정자 사이에서 황로 사상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도 했다. 황로 사상은 황제(黃帝)와 노자의 준말로, 노자의 사상이 정치나 군사에 적용된 것을 일컫는다. 한나라 개국 초기에는 계속된 전쟁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해졌다. 따라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더 잘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절실했다. 조참, 진평, 전숙, 급암, 직불의, 사마담 등이 황로 사상의 대가들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한 문제(漢文帝), 문제의 황후 두씨, 두씨 일가, 한 경제(漢景帝)도 황로 사상을 배웠다. 하지만 한나라 중기에 사회와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적 모순과 민족 갈등이 격화되고 정치 상황이 복잡해지자 도가 사상은 더 이상 통치 사상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유가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장릉

천사도를 창시한 인물. 천사도는 노자를 시조로 하며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곧 도교의 시작이었다.


한편 도가 사상의 한 줄기는 후한 시대에 도교로 발전했다. 당시 장릉(張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불렸던 천사도(天師道)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도교의 출발이었다. 이들은 노자를 시조로 하고, 도덕경을 경전으로 삼았다. 이후 도교는 불교와 결합하여 민간 신앙으로 발전해 현실의 고난을 비판하고, 새 세상을 원하는 민중의 바람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도교의 영향을 받은 민중 봉기가 다수 일어났다. <다음백과 발췌>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道可道 非常道(도가도 비상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도는 영원 불변의 도가 아니며, 

名可名 非常名(명가명 비상명)

표현될 수 있는 이름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名天地之始(무명천지지시) 有名萬物之母(유명만물지모)

무는 모든 것의 시작이며, 유는 모든 사물의 모체이다.

 

故常無(고상무)欲以觀其妙(욕이관기묘)常有(상유)欲以觀其(욕이관기)

그런 까닭에 항상 무에서 도의 오묘함을 보고자 하고, 항상 유에서 도의 단서를 보고자 한다.

 

此兩者(차양자)同出而異名(동출이이명)‘ 同謂之玄(동위지현), 玄之又玄(현지우현)衆妙之門(중묘지문)

이 두 가지는 다 같은 근원에서 나왔지만 명칭이 서로 다르며, 모두가 심오하다. 심오하고도 심오함의 문이며, 오묘하고도 오묘함의 문이다.

 

天下皆知(천하개지), 美之爲美(미지위미)斯惡已(사오이)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비교되는 것이 없으면 아름다운 것도 착한 것도 있을 수 없다.

 

아름다운 이가 있으므로 못생긴 사람은 일생을 괴로워하며 보내는 것이 아닌가 

착한 것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착하지 않은 사람이 아닌가? 

장자에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이 연못에 다가가더라도 물고기가 도망가는 것을

예로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인간들의 기준이라 말한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은 도덕경이 5000 자 이며, 한문의 대가(大家) 사마천도 도덕경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와 이야기하였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나, 그 용모는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욕심 많음과 얼굴과 태도를 꾸미는 일과 산만한 뜻을 버리라 

그런 것은 그대의 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잘 헤엄친다는 것도 안다.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물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질할 수 있으며, 나는 것에게는 주살을 쏘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용에 대하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그는 용과 같은 존재이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문은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敎化)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게 하였다.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더니 주나라의 덕이 쇠미하게 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장차 숨으시려고 하시는데,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글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도덕경 상하편 5천 언으로 도와 덕의 뜻을 말하고 가버렸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사람이 없다.

 

H. G. 월즈(공상 과학 소설인 "우주전쟁"을 쓴 사람이나 더 유명한 것은 "세계 문화사 대계"라는 방대한 책이다)"세계문화 소사"에는 한 장()을 공자와 노자에 할애하여 이렇게 썼다.

 

노자는 오랫동안 주왕조의 국립도서관을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으로,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가르침보다 더 신비적이고 막연하여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이나 권력에 대한 스토아학파적인 무관심과 과거의 공상적인, 단순한 생활에 돌아갈 것을 가르친 것 같다.

 

그가 남긴 저술은, 문체가 매우 간결한데다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여 수수께끼와 같다.

 

노자가 죽은 다음에 그의 가르침은 고타마 불타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타락하고 전설에 얽히어 매우 복잡하게 되었으며, 기이한 의식과 미신적인 사상이 그것에 부착되었다.

 

서양사람들이 동양에 대해 말할때는 거의 예외없이 처음에는 약간의 칭찬 후에 결과가 나쁘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서양의 역사를 말할 때는 반대로 기술한다.

 

2장 천하개지미(天下皆知美), 아름다움과 착함의 가치를 습격하다. 하늘아래 모두가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지만 이는 미운 것일 수 있다. 모두가 착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착한 것이라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없음과 있음은 서로를 생겨나게 하며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완성하게 하는 것이며 길고 짧음은 서로의 형태를 보완하는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에게 기울어지는 것이며 목소리와 악기소리는 서로 화음을 이루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조물주를 닮은 사람은 일하지 않은 듯 일을 처리하고 가르치지 않은 듯 가르침을 행하고 세상의 모든 사물을 만들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고 생겨나게 했으면서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했으면서도 티내지 않고 공을 이뤘으면서도 이룬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결코 집착하지 않기에 그것을 놔버린 적도 없다




도덕경 제2天下皆知美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현상적인 것을 절대가치로 삼지마라

 

1장에서 노자는 근원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이 함께 조물주의 뜻을 품고 있다고 말한 뒤,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상적인 것에 대한 인식체계를 흔든다. 현상적인 것이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현상적인 것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우리가 근원적인 것을 놓치는 이유라는 것을 실감나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기습적인 방식으로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자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그러면 누구누구요. 라고 자기가 아는 예쁜 여자를 거명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묻는다. 그 여자가 그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쁜 모씨보다도 더 예쁜가? 아니 그렇지는 않네요. 이런 대화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쁘다고 하는 것, 착하다고 하는 것은 다만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렇게 묻지 않았을지 모른다. 자네 그 여자가 왜 예쁘다고 생각하나? 우선 예쁘게 생겼고 조물조물 시원스럽게 생겼고 키도 적당하고 몸무게도 알맞고 목소리도 곱고 태도도 상냥해서 예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미추와 장단과 경중과 전후와 음성까지 모두가 상대적인 것이니, 그것은 절대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경계를 오가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세상 만물이 상대적인 가치 위에 있는 것일 뿐인데,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거나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세상만물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네.

 

노자는 세상의 모든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 속에 숨어있는 상대성을 열거한다. 있는 것이 아름답고 없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없어야 있는 게 생겨날 수 있다. 있어야 사라질 수 있다. 어느 게 낫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어려움은 좋고 쉬움은 나쁘다? 그렇지 않다. 길고 짧음과 높고 낮음도 그렇다.

 

100% 아름다움이나 100% 착함은 뭔가 잘못된 게 숨어있다

 

이런 방식으로 풀어낼 경우, 노자는 세상의 상식적인 인식의 허점을 꼬집으며 자신의 논리를 펼쳐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은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100%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100% 맹신 자체가 추악함이나 불미스러움이라는 관점이다. 이에 덧붙여 100% 선한 것 또한 있을 수 없으며 그런 것이 있다는 생각 자체가 옳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왜 그럴까. 자연 혹은 조물주는 세상의 존재를, 불완전 속에서 보완하면서 서로를 완성해가도록, 프로그램을 짜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사상에 대한 반격이다. 즉 아름다운 것과 착한 것이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과장해 세상사람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공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임의적으로 어떤 가치를 내세워 세상을 그것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려고 하는 노력은 추악하며 나쁘다는 비판이다.

 

조물주는 작위적인 뭔가를 하지 않고 굳이 논리로서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사물이 이미 상대적인 짝이 있어 서로 뭔가 하고 있고 서로를 말없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만물을 만들어 움직이게 했으면서도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자연을 그대로 둔다. 소유하지도 않고 티내지도 않고 그것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한번도 이 자연 속에 들어있는 '()'에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다.

 

상대적인 것이 저절로 움직이는 그 속에 도가 있으며, 어떤 특징이나 가치를 결코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놔둔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보성이 스스로 자연을 조절하며 세계를 꾸려가도록 생태계를 기획해놓았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하는' 도의 법칙(섭리)으로 자연 속에 스며들어있다는 게 노자의 주장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왜 아름답지 않는가

 

1장에서 인간의 뇌리에 서로 단단히 붙어있었던 명칭()과 근원()을 떼어 생각하게 한 노자는 역사를 근원의 시대와 명칭의 시대로 나눈다. 명칭의 시대가 본질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 대해 일깨운다. 문화나 문명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칭의 시대'와 같은 말이다.

 

만물은 이름으로 인식되고 이름은 바로 본질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이 아니기에 본질이 오히려 가려지고 등한시되는 결과를 낳았다. 명칭의 시대에 근원의 본질을 찾는 방법은 명칭에 구애받지 않고 근원에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름이 없던 시대에 옛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의 기틀에 일대충격을 준 노자는 바로 개념이 이룬 가치체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제2장이다. 먼저 거론한 것이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쉬운 미()의 문제다. 아름다운 것은 진짜 아름다운 것인가.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노자는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한다. 추하다는 개념이 없다면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들로만 되어 있다면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절대적인 것에 가까운 아름다움을 상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에 압도당한 상황을 말한 것이지 추함이라는 상대적인 가치를 전제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인의 아름다움은 젊은 날의 질풍노도를 만들어내는 기폭제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과 빛나는 피부, 눈부신 신체의 굴곡들이 자아내는 아우라는 이것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석할 틈도 없이 한 영혼에 들이닥쳐 아름다움의 전형으로 새겨진다. 한 여인의 형언할 수 없는 표정과 우수의 눈빛, 한 가닥의 엷은 웃음이 일으키는 빅뱅은 아름다움의 절대성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육체의 아름다움은 잠정적이고 한시적이며 지속 불가능한 불안한 어떤 상태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그 절대적인 미의 여신들이 가차 없이 늙어가는 것을 보며 깨닫는다. 늙어가는 자신을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미는 그런 주인을 배신하고 하나씩 패를 뒤집어 추()를 보여준다. 세상 모두가 미를 미라고 알고 있지만, 이에는 이미 추악이 숨어있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노자다.

 

절세미인 경국지색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름다움에는 추악함이 있다. 추악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있다. 추악함과 아름다움이란 상반되는 개념이 서로를 길항하는 개념이 가치의 실체이다. 아름다움이란 가치를 예찬하는 것은 추악함에 대한 두려움이나 기피를 숨기고 있을 뿐이다. 미추는 조물주가 프로그램화해놓은 감각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뿐애며, 따라서 미가 절대불변의 가치일 수 없다는 얘기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것은 대개 생명에 가깝고 추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 인간이 죽음을 회피하고 생기를 증대하려는 무의식이 이런 가치를 조장한다고 볼 수 있다. 노자가 미에 대한 가치 교정부터 나선 까닭은 가장 이해하기 쉽고 충격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쁜 여성을 예를 들고, 그녀도 역시 추악함과 끊임없이 다퉈야 하는 잠정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노자는 미와 대립된 개념으로 추()를 쓰지 않고 악()을 쓰고 있다. 두번째 구절에는 바로 선이 나오는데 미추와 선악을 세트로 썼으면 좋았을 법 한데, 왜 미악(美惡)과 선불선(線不善)으로 맞세웠을까.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배치했을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는 아름다움이 지닌 악함을 내세워 설득력을 높이려 했던 것 같다. 공자와 노자가 살던 시대 이전의 중국 고대국가 하나라의 걸왕을 보라. 말희가 망치지 않았던가. 은나라 주왕을 녹인 달기, 주나라 유왕이 푹 빠졌던 포사,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여희는 모두 경국지색의 악녀로 손꼽혔다. 그리고 도탄에 빠진 백성의 증오대상이었다. 천하가 모두 아름다움으로 떠받들던 그녀들이 결국은 악()과 증오(憎惡)대상이 아니었던가. 노자가 미와 악을 병치한 건 그런 역사적 교훈을 읽었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을 비웃다

 

노자는 이쯤에서 '()'의 문제를 꺼낸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 대목이다. 당시 선을 부르짖고 다녔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공자이다. 공자의 논지를 흔드는 상대적 가치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공자는 '춘추'라는 역사책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이 책은 주대(周代) 노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한 242년의 역사서이다. 사관들이 편년체로 기록해놓은 것을 공자가 자신의 윤리적 관점으로 편집한 책이다. 공자시대의 좌구명이란 사람이 주석을 달아 펴낸 것이 '춘추좌씨전'인데 이 책은 '악은 징벌하고 선은 권한다(勸善懲惡), 성인이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편집할 수 있었겠는가"라며 공자를 예찬한다.

 

춘추좌씨전이 나온 이후 '권선징악'이란 말은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춘추의 편집자 공자는 선을 권하고 악을 징벌하라는 정언명령을 내린 위대한 아이콘이 된다. 공자가 인간을 넘어 성인으로 추앙받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춘추좌씨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공자의 도덕역사서에 감격하고 있을 때 "그건 헛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게 노자다. 그토록 단호하게 선을 권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노자는 공자 주장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는 권선징악론이 지닌 기계적인 잣대를 슬쩍 허물어뜨린다. "모두가 선을 선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기엔 불선(不善)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선하지 않음이 세상에 넘치기에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선을 권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사람이 선한 얘기를 한다고 좋아라 하지만 사실은 선하지 않은 세상을 그가 이미 전제하고 있기에 그것을 가치로 세일즈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공자로선 정말 듣기 싫은 시비였을지도 모른다.

 

선함과 선하지 않음은 상대적인 개념이며 세상이 구분해놓은 가치일 뿐이다. 선한 것을 권한다고 반드시 선해지지 않으며 악한 것을 징벌한다고 악함이 제대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조물주가 이미 그 상대적인 양상을 모두 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인간이 예찬하고 강요한다고 선한 세상이 되지는 않으니, 그 그늘과 이면까지를 생각해야 무리한 권선징악이 낳을 수 있는 폐단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가치로 세상을 한 줄로 세우려는 기획은 세상을 편안하게 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역사를 통해 자주 깨달았다. 어떤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강제와 폭력이 발생하고 다양한 삶의 양식과 개별적인 주체의 선택을 무히사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제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도 경험을 통해 배워왔다.

 

그러면서 노자는 우주를 이루는 상보적인 존재양상을 죽 나열한다. 유무, 난이,장단,고저,음성,전후의 상대성을 보여주면서 선과 악이 하나의 모체에서 나온 양립하는 문제임을 설득한다. 악을 때려잡고 선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도덕전쟁을 벌이는 것이 세상을 경영하는 옳은 방식이 아니며 선과 악이 병존하며 길항하는 특성을 잘 파악해 자연스러움의 정도에서 그치도록 세심하게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다. '서로 다른 가치를 존중하라." 이런 캐치프레이즈다.

 

공자의 '성인'과는 다른 노자의 '성인'

 

가치의 양면성을 강조하고 다른 가치를 억압하는 것이 세상만물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라는 논지의 말을 한 뒤 노자는 '성인'이란 존재를 불쑥 들이민다. 공자는 유학자적인 전범을 보인 옛사람을 성인이라고 불렀다. 당시의 상식으로 성인은 당연히 유학자였을 것이다. 공자가 평생 흠모했고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한 인물은 무왕의 동생 주공이다. 무왕은 동생인 주공을 전략가로 등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주공은 형님이자 천자인 무왕의 스승 역할을 했다.

 

주공은 무왕을 도와 주나라 개국 초기의 국가질서를 세운다. 무왕은 집권한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주공은 왕위를 맡아달라는 청을 사양하고, 무왕의 아들인 희송에게 왕위를 잇게 한다. 이분이 성왕이다. 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에 주공은 제국을 섭정하는데 이때 나라의 기틀을 갖추는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성공시킨. 주공이 세운 국가 시스템은 이후 천년동안 중국대륙을 이끈 핵심모델이 된다. 공자가 그를 주목한 것은 인품과 자질과 업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후국 노나라의 정치브레인이었던 주공의 성공스토리를 발판으로 노나라 출신이었던 자신의 사상적 권위를 강조하고자 하는 전략도 있었을 것이다. 공자는 유학자의 미덕과 실천력을 함께 갖춘 주공을 성인이라 일컬으며 그와 닮은 일이 바로 유학자의 길이라고 강조해왔다.

 

그런데 노자는 전혀 다른 '낯선 성인'을 불쑥 들이민다. 노자의 성인은 주공처럼 정치가로 팔을 걷고 국가업무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한 무위로써 일을 처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한 불언으로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 분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큰 일을 성공시켜도 자신이 했다는 티를 내지 않고 공을 세운 뒤엔 그것에서 바람처럼 물러나는 분, 물러났지만 굳이 떠난 것은 아니기에 늘 그 자리에 계신 분. 이 분은 누구란 말인가.

 

노자의 성인은, 어떤 가치 쪽으로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그것이 무위다. 어떤 가치가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언이다. 공자는 권선징악을 하라고 했으니 유위(有爲)로써 일을 처리했고 이게 옳고 저게 그르다고 말을 했으니 유언(有言)이었고 주공의 공적에 머물러 있었으니 유거(有居)였다. 공자의 성인은 노자의 잣대로는 도저히 성인이라 할 수 없었다. 여기에 이 글의 긴장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누구인가. 도덕경 내내 그는 이것만을 의식하는 듯해 보일 정도로 집요하다. 그 분은 세상 천지만물을 만든 조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