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성과 철학성의 조화

2016. 4. 24. 18:07☎순수수필작가회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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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봄 문창 1)                                                                          미학성과 철학성의 조화

 

문광영

 

문학()는 새로움, 재미, 깨달음의 감동, 통찰을 보여주어야 한다.”

 

외모도 예쁘고, 마음도 고우며 생각이 깊으면 얼마나 좋을까문학도 마찬가지다.

 

옛말에 미인이 많으면 나라가 융성해진다는 말이 있다.

아름다움(), 사람이나 작품이나 언제나 영원한 고민이며 꿈이고 희망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얼굴 모습을 지녔다 하여도 몸매가 따라주지 못하면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아무리 훌륭한 몸매를 자랑한다 하여도 얼굴의 모습이 따라주지 못하면 이 또한 미인이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 흐름이며 현실이다.

옛 흘러가 노래에 얼굴이 곱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노랫말도 있다. 어쩌면 이 노래의 배경에는 미의 기준을 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외적인 아름다움에 더욱 치중한 당시의 세태를 심히 염려하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좌절하는 수많는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한 위로의 노래가 아니었다 싶다. 또 실재로 그 당시에는 못생긴 사람들의 마음씨가 더욱 좋았고, 예쁜 여자들은 어딘지 고약스럽고 또 얼굴값 한다는 말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요즈믜 흐름을 보면 정 반대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흔히들 말하는 생긴 대로 놀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사람은 마음씨와 행동도 아름답고 못생긴 사람은 그만큼 성질도 못되었다는 것이다. 사회 심리학적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외모도 예쁘고, 마음도 고우며 깊고, 지적이면 얼마나 좋을가문학도 마찬가지다.

 

2. 감성을 키우고, 책을 읽어라. 책읽기, 그자체가 선()적 삶이다.

인간의 본디 외롭다. 본질적으로 외로운 것이다. 외롭기 때문에, 인간은 슬픈 것이다.

또 인간은 반면, 즐겁게 살아야 한다. 인생은 여행자 : 출생 죽음

책을 읽는 것은 밥을 먹는 것과 같다. 육신의 배고픔을 위하여 밥으 찾아 먹고, 정신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군자로서 자유인/소인배, 속물인간)

문하가는 사람은 느낌과 생각을 늘 글로 쓰는 부지런한 행동이 필수다.

 

3. 람은 느낌과 생각이 많아야 하고, 세계와의 교섭, 교감, 통섭하며 살아야 한다.

肉眼腦眼 임기응변, 소인배, 속물적으로 사는 사람

心眼靈眼 미학과 사색에 잠겨 君子로 인생을 갈무리하면서 사는 사람.

 




  

                                        꽝꽁 언 겨울 강이

                                        왜 밤마다 쩡쩡 울음소리를 내는지

                                        넣희는 아느냐

                                        별들도 잠들지 못하고

                                        왜 끝내는 겨울 강을 따라 울고야 마는지

                                        너희는 아느냐

                                        산채로 인간의 초고추장에 듬뿍 찍혀 먹힌

                                        어린빙어들이 너무 불쌍해

                                        겨울 강이 참다 참다 끝내는

                                         터뜨린 울음인줄을.

 

정호승 <겨울강> 전문




 


 

4. 몰입적 감성의 느낌과 생각(정신), 깨달음이 충만한 사람이 시()을 잘 쓴다.

예술미(아름다움)는 감성적 교감의 의미부여에서 탄생한다.

반지의 아름다움은 반지라는 모형과 색깔, 기하학적 문양의 감각적 실체와 반지를 선물한 사람이 기원하는 정신(의미, 생각)이 결합된 것이어서 더욱 소중하고 가치 있고, 아름답다.

 

세계에 대한 현실인식(감각적 인식 + 가치지향적인 의미(정신, 사고)

 

5. 세상만사에 의미를 붙이면서 교감, 일체감 소에서 살아갈 일이다.

김춘수의 <>처럼 너에게 이름 붙여주었을 때 비로서 다가오는 꽃처럼 세상만상에 의미를 붙이면서 교가마, 일체감 속에서 살아갈 일이다.

죤듀의 미적체험, 형식주의 미학, 변증법적 미학들의 개념을 살펴라.

 

6. 문학()이란 아름다우면서도 무언가 생각하게 만드는 게 작품이다.

 

- 아름답다는 말은 美學性,

- 생각하게 만든다는 말은 哲學性을 뜻한다.




 

삶은 달걀이다. - 그래, 삶은 달걀이다. 삶에도 유정란, 무정란이 있고 삶에도 껍질과 알맹이, 노른자위와 흰자위가 있고 삶도 굴러가고 그런 만큼 늘 아슬아슬하고 그러다가 더러는 금이 가고 깨지고 증발해 버리고 삶도 아예 제 몸을 바위 따위에 날려 차라리 박살이 나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삶도 누군가의 따스한 품에 안겨 개나리꽃빛 햇병아리가 되고 높은 지붕위에 의젓이 날아오르는 수탉이 되어 새벽과 한낮을 알리기도 하고 삶에도 똥이나 피가 묻어 있기도 하고 삶도 누군가에게 삶아 먹히기도 하고 삶도 돈달걀이 되기도 하고 삶도 둥글어야 하고 그러자니 또 바로 서기 어렵기도하고 삶에도 중금속이며 항생제 따위의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있기도 하고

 

백우선 <삶은 달걀> 전문




 

어떤 사람이 도를 닦으러 산으로 갔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이치를 깨쳐 도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도 진정한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 사람은 하산을 결심했습니다. 그 사람이 시골 장터를 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계란장수 할머니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삶은 달걀이요.!”

이 말에 그 사람은 단박에 도를 깨쳤다고 합니다. ‘익힘살아감의 이중적인 말뜻도 재미있지만 여기 서우리는 문자와 의미에 얽매이지 않는 진정한 삶의 진실을 발결할 수 있습니다. ‘삶은 달걀이 곧 삶이요, ‘이 곧 달걀과도 같은 이치라는 것이지요. 동그렇게 생겨서 돌리면 비틀거리며 도는 달걀, 삶도 이러첢 기우뚱거리며 도는 건 아닐까요. 중심을 잡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달걀 노른자위를 많이 먹으면 동맥경화에 걸린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하자면 권력 있는 자들이 동맥 경화에 걸린 말과 행동, 의식, 그리고 후안무치를 꼬집는 말이겠지요 흰자위인 국민들의 냉정한 심판을 자발적인 떠받듦으로 착각하여 그 환상에 중독되어 버린 위정자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상한 달걀은 소금물에 담그면 떠오릅니다. 보기엔 다 똑은 달걀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검사를 해보면 구분이 됩니다. 상한 달걀이 물 위로 떠오르듯, 머리 내밀기 좋아하고 드러내 보이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는 도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의 삶은 여러 모로 달걀을 닮았습니다. 진정 우리의 삶이 남에게 보호받는 삶이라기 보다는 남을 보호하는 삶, 달걀의 껍질과 같은 삶도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노른다위 같은 삶도 물론 중요하지만 모두가 노른자위가 될 수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노른자위는 주어진 특권만큼 베풀어야겠지요.

남보다 돋보이기를 원하는 삶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직업의 특성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비록 스스로 뜨지 못하는 달걀이라 할지라도 펄떡이며 튀어오르는 생산처럼 싱상히고, 가을 알밤처럼 속이 꽉 찬 삶을 살겠다는 다짐만은 늘 가슴속에 간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최복현 <삶은 달걀이다>

 

          



                                        접시 위에 달걀이 있다.

                                        한 개의 정물(靜物).

                                        나는 달걀을 바라본다.

 

                                       달걀은 완전하다.

                                       완벽한 구()는 아니지만

                                       타원으로 멋스러움을 더했으므로, 미학의 완성이다.

 

                                       달걀은 여인처럼 아름답다.

                                       단단한 갑옷을 둘러지만 사실은 얇기 그지없는 껍질을 벗기면

                                       하얗고 매끄러운 속살이 순결한 밤으로 다가온다.

                                       달걀은 따뜻하다. 모성처럼

 

                                      자궁에서부터 둥지까지

                                      뜨겁게 달궈질 때까지 달걀은

                                      라캉의 상징처럼 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달걀을 먹을 때마다 모성을 생각하며 목이 멘다.

 

                                     이처럼 성스러운

                                     달걀은 하나의 세포.

                                     한 개의 핵과 세포질을 가진 원초적 생명체

                                     뜨거운 핵과 맨틀을 가진 지구와 동일한 구조,

                                     그러므로 달걀은 지구와 같다.

 

                                     달걀은 이야기를 한다.

                                     난생설화,

                                     주몽, 박혁거세, 김수로, 김알지

                                     왜 위대한 인물들은 하필 달걀 속에서 태어나고자 하는 것일가까?

                                    그리하여 달걀은 마침내 신화가 된다.

 

                                   신화의 줄거리를 따라 태어난 원향(遠鄕)을 찾아

                                   달걀은 먼 여행을 한다.

                                   기차 창가에 앉아 한때 그가 훨훨 날았던 창공을 본다.

                                      그리고 망 속에 든 이야기를 하나씩 까먹는다.

 

                                 영혼의무게 21그램.

                                 달걀의 무게 57그램.

                                 그렇다면 단 한 개의 세포인 달걀은 얼마나 더 훌륭한가?

 

                                 닭들은 내일의 부화를 꿈꾸며 무수한알을 낳는다.

                                 인간도 닭처럼 무수한 교미를 위해 섶을 들썩이다.

                                 인간의 밤은 닭을 빼닮았다.

 

                                 횟대에서 새벽을 깨치는 아침이다.

                                 닭들이 외쳐야만 새벽은 온다.

                                 일어나라! 세상의 모든 세포들이여!

                                 일어나 간지러운 땅을 밟아 보자꾸나

 

                                 달걀은 소금을 만날 대 가장 진가를 발휘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빛난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식탁에서

                                 그리스도 같은 부화을 꿈꾸며 경배한다.

                                 날자. 한번만 더 날아보자 꾸나.

                                 이카루스처럼 빛나는 태양을 향해 깃털을 쳐 올라가 보자꾸나

                                 선녀와 폭포의 두레박이 안닌 내 날개로 날아 보자꾸나.

                                 선녀폭포의 두레박이 안닌 내 날개로 날아보자꾸나.

                                 비록 식탁에 배달된 하루가 프라이팬처럼 으깨진 것일지라도.

 

김규진 <진달래에 대한 명상> 전문



 

7. 시의 소재는 무궁무진하지만 현미경적 사고가 필요하다, 야생화, 물똥, 구더기, 페선, 갯벌, 노숙자, 백수 등)

 

의미부여 이전에 소재의 선택이 중요하다. (망원경적 대상현미경적 사고)

하늘의 별과 바람, 동식물의 자연, 인공물의 사물존재, 인간의 본질적 소재부터 인생, 일상의 문제(고령화, 도시노동자, 농촌문제, 인권 등) 참여문학 순수문학.

 

8. 예술은 인간정신(생각과 감정)의 소산인 까닭에 작가가 선택한 세계에 대한 혹은 인생에 대한 그 나름의 해석이나 시점이 표현되지 않을 수 없다.

 

[계간 시인수첩봄호 좌담회] 한국 詩壇의 문제점 비판 (조선일보 2.29일자)

 

원로 시인의 쓴소리 요즘 시인, 욕구불만 배설하듯 詩作

 

(김남조오세영이건청신달자김태준 시인)

 

원로 시인드이 오늘의 한국시에 대해 쓴소리를 던졌다.

이번 주 나올 계간 시인수첩봄호는 김남조(89), 오세영(74), 이건청(74), 신달자(73) 시인을 초대한 좌담 한국 현대시의 반성과 전망을 통해 시단(詩壇)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좌담 사회를 맡은 김태준(69) 시인은 한국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젊은 시인들의 난해시 유행과 시() 독자의 감소라고 꼽았다. 오세영 시인은 시인이 넘쳐났기에 시 독자가 즐어들었다는 역설을 햇다. 그는 시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독자는 시 작품의 홍수 속에 빠져 오히려 시를 외면하게 됐다수만 명의 시인이 자타가 인정하는 등단 절차를 밟아 공인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시를 싣는 월간지와 계간지가 200여종이다 되다 보니 등단이 과거에 비해 쉬워지면서 수준 이하의 시인들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시단(詩壇0에서도 시인 숫자를 정확히 집계하지 못해 그냥 2만여 명으로 추산한다. 오 시인은 시인이 많아지다 보니 시 수준이 떨어졌다며 지하철에 게시된 시를 거론했다. 그는 시를 선양하기는커녕 오히려 독자들에게 시에 대한 협오감 혹은 모멸감을 확산시켜 시로부터 독자들을 추방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이건청 시인은 시의 범람을 지적했다. 그는 문예지 편집자들이 신작 특집이다 소시집(小詩集)이다해서 다작(多作)을 부추긴다결과적으로 이런 시의 난맥상이 시의 위의(威儀)를 무너뜨리고 시가 설자리 자체를 축소하는 요인이 된다고 비판했다. 이런 시의 홍수사태와 관련해 김남조 시인은 박목월 시인의 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를 꺼냈다. “그분은 이마로 돌을 간다고 할 만큼 시를 힘겹게 쓰셨지요. 며칠쯤은 자는 일 먹는 일 잊고 가족의 접근도 제한하는 경우가 여러 번입니다라고 회상했다는 것.

원로 시인들은 2000년대 이후 등단한 젊은 시인들과 거기에 동조하는 평론가들도 성토했다. 신달자 시인은 소통이 되지 않는 시가 독자를 밀어내고 시집 판매까지 어둔하게 한다시를 써온 전문가도 알아듣지 못하는 시가 좋은 시로 떠받들리는 일에 대해 좀 더 핵심을 파고들어 그 단위를 가려내야 한ᄃᆞ고 지적했다. 오세영 시인은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풍(詩風)을 너무 쉬운 사실의 시와 너무 어려운 망상의 시로 나눠 분석햇다. ‘사실의 시는 일상생활의 단면을 그대로 베껴놓곤 은유도 상징도 없이 쉬운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 수필의 한 토막 같기에 시의 본령에서 벗어났다는 얘기다. 오 시인은 망상의 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야기되는 어떤 이질적이며 상화 단절된 의미들이나 관념을 무책임하게 그져 토설한는 것이다.

이건청 시인은 시의 산문화현상을 비판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이 시를 광고 자체가 겪는 욕구불만의 배설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시의 행수가 20~30행이 넘는 경우가 상당수인데 이는 정련되지 못한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문화센터의 시 창작 강좌에서 시인이 수강갱의 작품을 첨삭 지도해 등단을 돕는 현상도 비판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시인들은 시인들의 자기반성시의 창작 윤리 바로 서기를 제시했다.

 

9. 문학은 다른 예술보다 더국 정치하고, 철학성(사상성)을 드러낸다.

 

문학은 그림이나 음악, 사진과 같은 여타의 예술과 다른데, 철학(사상)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적극적이고 정치(精緻)할 뿐만 아니라, 파급효과가 큰 예술이다.

 

Voltaire<철학서간>Rousseau<에밀> 작품 : 18세기 대혁명의 촉발제

Tolstoi <부활> : 네플류도 백작의 참회와 구언, 러시아 농노해방의 결적적인 역할

Albert Camus <이방인><시지프의 신화> : 인생의 부조리에 대한 새로운 발견.

J.psart<> : 인잔존재 조건의 탐구.

F>Kafa <변신> : 자아정체성의 확인.

이광수의 <무정> : 새로운 교욱관, 자우연애에 풍조.

심훈의 <상록수 : 농촌계몽운동에 불을 당김.

이문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불의한 폭력이 정의를 유린하는 현실.

 

사과가 떨어진다” 1) 과학적 진리 : 萬有引力 ---- 腦眼의 진리

2) 문학적 진리 : 無始無終, 輪迴, 循環生卽死 死卽生 ----靈眼의 진리

 

10. 미학성과 철학성이 조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 창작엣 미적 세계관만을 탐닉하는 경우 : 아름다움, 쾌락, 즐거움 등만을 추구하는 까닭에 이들의 시에는 세계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해석이나 진실 탐구가 결여되어 있기가 쉽다. (유미주의 퇴폐적인 경지, 데카당스의 문학)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와서 부숴진다.”

죽음은 귀찮아서 택시로 바꾸어 탔다.”

당신 발바닥은 쓰시마섬 같애.”

 

그런데 문학, 시에 있어서 이 미학성과 철학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예술적으로 형상화낸다는 것은 대단히 얼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상호 반댇되는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이루어지 기 때문이다.

 

미학성 : 비약이나 반어, 비우, 상징 등 논리적 모순의 진실에 토대(바탕)을 둠. 상상의 소산, 감정의 소산, 직관적 작용, 감각적, 구체적 이미지 표현

철학성 : 논리의 진실에 토대(바탕)로 함. 사유의 소산, 이성의 작용, 분석적, 관념적 표현


나는 슬프다” (슬픔의 관념적, 추상적 진술 :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

내 마음은 벌레 먹은 능금잎”(슬픔의 구체적이미지, 은유이며,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와서 부숴진다.”

죽음은 귀찮아서 택시로 바꾸어 탔다.”

당신 발바닥은 쓰시마섬 같에.”

 

11. 그래서 문학, 시는 이 미학성과 철학성의 모순된 정신의 질서를 동일한 고도의 책력적 언어진술로 조화시켜나가야 한다.

 

시인의 사상이나 이념의 철학성은 관념적으로 직설되지 않고 이미지나 은유에 의해 내면화 되고 혹은 변주되는 구체적 진술로 일우어진다.

시란 오로지 기본적으로 이미지나 은유 혹은 상징으로 쓰여지는 언어진술이다.

시의 미학성과 철학성은 이러한 언어변용(이전)’에 의해서 생겨나고, 이미지나 은유, 신화의 창조등 고차원적인 책략이 필요하다.






 

                                    더러는 비워 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 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 보내듯이

                                 갈밭머리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도

                                 그리움으로 빛날 때까지는

                                 또는 바삐 바삐 서녘 하늘을 깨워가는

                                 갈바람 소리에

                                 우리 으스러 지도록 온몸을 태우며

                                 마지막 이 바닷가에서

                                 캄캄하게 저물 이이다.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전문







 

12. 본래적 자아와 만나는 체험적 소재에서 비롯되는 만큼 체험적 깊이가 중요하다.

 

<적막한 바닷가>는 미학성과 철학성이 잘 조화된 시이고, 구체적인 이미지의 유기적 조직으로 되어 있다.

체험에서 동원된 이미지 갯가, 밀물, 썰물, 해오라기, 갈밭 따위 역시 철학화되어 있다.

 

화자는 가을 저물녁 바닥가엣 서 있다.

해가 뉘엿누엿 지면서 밤이 찾아든다.

조금 전 밀물로 차오르던 갯물은 어느새 썰물로 바뀌어 나간다.

싱인은 텅 비어가는 갯가에서 서서 밀려드는 밤의 어둠을 가슴으로 받는다.

그의 가슴에 허무와 적막이 깃든다. 그순간,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 본다.

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허무감과 고독감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고, 기쁨과 충족도 있었는데.

돌이켜보니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 같다.

자신이 목표를 성취하기 우해, 이득을 위해 때로 남을 미워하고 시기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부끄럽고 헛t된 것이었다.

우매하게도 그런 자신의 일에 대해 후회하고 깨닫는다.

인생, , 권력, 여자, 명예 등 조금은 더 얻었다 하더라도

생이란 이처럼 어두워지는 가을 바닷가의 썰물처럼 지는 것인데.

 

화자는 갈대밭이 우거져있는 가을 바닷가의 황혼에 서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회한에 젖는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본래적인 자아와 만나는 체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의 근원적 의미를 돼새겨 볼 수 있었던 것은 가을바다라는 자연의 순리적인 한 현상과 특별한 영감, 영안의 순간, 곧 특별한 교감의 순간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생무상과 일상적 삶의 허무석을 발견하는 철학적 차원의 눈높이를 읽는다.

바닷가의 체험을 감각적인 언어(이미지)로 그려내는 보여주기의 미학성과 동시에 내면화된, 의미부여된 철학성으로 형상화된 시이다.

 

13. 좋은 시 () 창작은 나름의 책략이 필요하다.

 

시인이 바다를 보는 눈은 날카로우면서 동기에 책략적이다.

황혼이라는 시간과 무한이라는 텅빈 갯벌의 공간, 그리고 갈대숲,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불고 있다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대한 허무, 생의 본질적인 의미를 자각하게 된다.

인생 역시 바다 같아서 자신을 비우는 삶이야 말로 진실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바다가 아침이 되어 밀물로 채워지는 것같이 영원에 대해, 무한에 대해, 그리워 하는 일이 야 말로 일상의 비속한 삶을 초원할 수 있는 길이 된다는 사실./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바닷가의 해오라기처럼 자연의 순리에 맡겨 사는 삶.

시인은 가을 황혼녘 썰물이 지는 바닷가 갈밭에서 서서 자신의 소유를 스스로 비어버리는 자연의 갯벌이 순응적이고, 오히려 삶을 충만케 하는 삶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깨우친다.

(철학성

 

14. 시의 미학성과 철학성의 조화는 대상과 화자가 일체감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상상놀이다.




 

                                    나무야

                                 너는 하나의 절이다.

                                 네 안에서 목탁 소리가 난다.

                                 비 갠 후

                                 물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

                                 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

                                 가고 있는 너에게서

                                 꽃 피는 소리 들린다.

                                 나비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새 알 낳는 고통이 비친다.

                                 네 가지에 피어난 구름꽃

                                 별꽃 뜯어 먹으며 노니는

                                 물고기들

                                 떨리는 우주의 속삭임

                                 네 안에서 나는 듣는다.

                                 산이 걸어가는 소리

                                 너를 보며 나는 또 본다. 물속을 거꾸로

                                 염불 외고 가는 한 스님 모습,

 

이영선 <나무 안의 절> 전문



 

 

한 편의 시 속에 우주가 들어가 있음을 본다. 위의 시에서 가장 먼저 읽을 수 있는 특징은 식물인 나무에 인격을 부여하여 나우야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첫 행이다. 나무를 라고 부름으로써 시인은 나무와 화자의 거리감을 무너뜨린다. 식물인 나무와 인간인 화자가 동일화되는 것이다.

시인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가 품은 도()를 절[]로 은유한다. 절은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도를 추구하여 부처가 되고자 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수양하는 곳이다. 그곳에 도를 찾는 사람들이 있기에 공간 자체가 성()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무 자체를 절로 비유하는 시인의 시선은, 사시사철 나무가 보여 주는 모습에서 도를 읽어내는 자세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무의 사철 풍경은 어떠한가. 나무에 깃든 새들이 쪼아 대는 소리로 인해 나무에게서는 목탁 소리가 울려 퍼진다. 자기 몸이 쪼이는 고통 속에서도 나무는 자신의 몸을 새들이 머물 공간으로 내어준다. 또한, 비가 오면 그 비를 피하지 않고 맞으며 젖어드는 나무 앞에서 시인은 새로운 풍경을 열어 보인다. “물속 네 그림자를 바라보면/거꾸로 서서 또 한 세계를 열어놓고에서 볼 수 있드, 나무 앞에 물웅덩이가 있었든지 혹은 나무 앞에 연못이 있었든지 나무를 중심으로 하늘과 땅이라는 수식저인 양극이 하나의 풍경 속에 겹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구름과 별, 밤과 낮, 계절과 시간이 나무의 물그림자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 아래 통합된다.

실제로 나무는 뿌리가 땅에 고정되어 있지만 하늘을 향해 줄기와 가지를 뻗는다는 점에서 상승 지향적인 인간의 운명과 유사한 상징체로 활용되곤 한다 시인은 떨리는 우주의 속상임, “산이 걸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과 삶을 재현하는 신화적인 우주수(宇宙樹)의 이미지를 시 속에서 변용하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우주수의 거대하고 위엄 있는 모습 대신, 작은 새와 나비를 키우는 한 그루 나무의 친근함을 강조 한다는 것이다. 이는 시인의 동일화된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염불 외고 가는 스님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게 된다. 이때 스님은 나무의 의이노화이자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나무가 물그림자에 자신의 반신을 비추듯, 시인 역시 세속의 욕망을 뚜이넘어 고요하고 평안한 초월의 경지에 다다르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이는 완전히 속()된 세상을 버릴 수 없음을, 이곳에 남아 그곳으로 가는 스님을 바라보는 자세를 통해 확인된다. ()이 너머의 공간으로 가는 것에 반해, 시는 너머의 공간을 바라보되 그곳을 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다. 가고 싶지만 가지 않는, 혹은 갈 수 없는 생의 아쉬움과 아타까움은 오히려 초월과 상승에 대한 욕구를 미학적으로 그려내는 원동력이 된다. (김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