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5. 16:03ㆍ☎일어나라대한민국☎
내 고향 파주 탄현 "약산 198m" 동심회 산행
유튜브 영상 뉴스 보기
인천N방송 뉴스 보기
http://www.incheonntv.com/pmain/viewUcc.do?vodid=VOD0000000024178&ucc=uc08
북녘땅 바라보는 최전방 약산(198m)산행
‘여우도 죽을때가 되면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속담이 있다.
6월 4일은 늘 나와 함께 산행을 함께하는 동심회(童心會) 번개산행날이다. 지난번 무의도 산행길때 다음 산행지를 정하는데, 나는 6·25 한국전쟁으로 일곱 살때 피난나와 귀향하지 않고 뿌리내려 서른두살까지 살았던 나의 제2에 고향 약산(198m) 산행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6월 4일 번개 산행지를 약산으로 정했다.
솔직히 이야기 하면 약산은 산세가 얕고 산행시간 또한 짧아서 그런지 지금까지 “약산”에 대한 산행기나 여행기를 그동안 내가 두 서너번 쓴것이외 보지를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동심회원님들이 우리동네 산행을 하고 나면 내고향 약산에 대한 여러편의 산행기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산은 그 옛날(196~70년대) 지금처럼 산림이 울창하지 않았을때는 봄이면 진달래가 산전체를 빨갛게 물들여 “소월시에 등장하는 영변 약산진달래”의 곳이라고 우스게 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뿐 아니다. 약산에 오르면 바로 코앞에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녘땅 옛 지명 : 경기도 개풍군 일대 농촌마을 풍경과, 요즘같은 盛夏의 계절에도 시뻘겋게 벌거숭가 된 민둥산을 보며 북한이 빈곤하게 살아야하는 이유를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개성, 송악산, 덕물산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약산에 고도차가 별로 없는 2개의 봉우리가 있다. 법흥리에 있는 유승앙브즈아파트 109동 언덕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살래길이라 이름붙여진 등산로는 노, 약자들도 그다지 큰 어려움없이 산행을 할 수 있다. 살래길을 따라가다 보면 정상으로 가는 길과 살래길로 가는코스로 나뉘어 진다.
우리는 정상으로 진행하는 코스를 따라 올라간다. 일명 고래 뒤산이라 불리는 1봉은 다소의 암봉지대다. 그러나 등산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게 이어지는 널널 코스다. 1봉을 지나 열쇠고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어 일명 아랫마을 뒤산이라 불리던 2봉에 올라서면 조망이 시원하다. 멀리 개성방향, 강화 마니산 방향, 더 멀리 서해바다. 북한산국립공원 삼각산, 관악산, 인천의 계양산, 소래산이 한눈에 조망된다.
2봉에서 조망을 마치고 하산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산 84번지 작골로 내려서면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 검단사가 있다. 또한 전방에는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있다. 뿐만아니다. 인근에는 올림픽 국가대표 축구 트레이닝 센터가 있으며, 바로 위로는 고려역사박물관도 있다. 그리고 1킬로 정도 거리 탄현면 갈현3리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이조 16대 인조대왕능”도 있다.
으이그 착한님이 단체사진에 잘렸네요. 실례
멀리 현우(인홍)네 농장에 세운 육모정자(웰컴투솔레미오) 건물
파주 검단사(黔丹寺)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 탄현면(炭縣面) 성동리(城洞里) 산 84번지 오두산(鰲頭山)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847년(신라 문성왕 9) 혜소(慧昭)가 창건하였다.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사찰이 있는 오두산이 검은 편이라 검단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1731년(정조 7) 장릉(長陵)을 탄현면 갈현리로 옮길 때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이후 장릉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해서 한때는 두구사(豆拘寺)라고도 불렀다.
1906년 김정호(金正昊)가 법당을 중수하였다. 건물로는 법당인 법화전과 요사채가 있고, 유물로는 아미타불탱화와 신중탱화, 검단선사영정 등이 전해지고 있다. 탱화는 19세기말에 제작된 것이고, 검단선사영정은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원본을 토대로 조선 후기에 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 내의 석불은 등신불(等身佛)로 천여 년 간 버려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때 인근 금산리 보현암에서 수습하여 보존해오던 것이다.
검단사(黔丹寺)는 탄현면 성동리의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부근의 검단산 산허리에 위치한다. 이 사찰은 신라때 검단조사(黔丹祖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실제로 조선후기에 그려진 ‘검단조사 영정(黔丹祖師 影幀)’ 1폭이 전해지고 있어 검단조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단조사의 생존연대는 불명확하지만 신라의 고승이었다고 전해지며 전국 각지에 검단조사와 관련된창건설을 가진 사찰이 분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현재 원사지(原寺址)로 추정되는 대지 중심지에는 별다른 건물이 없고 대지 오른쪽에 치우쳐 지금의 사찰이 겨우 잔존하고 있는데 법당인 법화전(法華殿)과 요사채가 남아있다.
법화전은 새로 수리된 부분이 많이 있으나 대체로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절의 유일한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불단(佛壇)이 있으며, 불단위에는 작은 불상이 그 뒤로는 후불정화(後佛幀畵)가 봉안되어 있고 벽면에는 ‘검단조사영정’이 걸려 있다. 불상은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경기도 문화재자료(제144호)로 등록되었다.
19세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 후불탱화는아미타불과 그 권속들을 그린 것으로 아미타불은 높은 대좌 위에 앉아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을 한 단정한 불상이고 이 주위로 관음·세지 등 6대 보살을 함께 그린 칠존도(七尊圖)이다. 여기에 아난·가섭 등 제자를 그리고 네 모서리에각각 사천왕(四天王)이 배치된 특이한 구도의 불화이다. 이 후불탱화로 미루어보아 원래 본존불상은 아미타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단사 유적에 얽힌 설화
서기 847년(신라 문성왕 9)에 검단선사黔丹道師(眞監國師 慧照) 또는 얼굴이 검어 흑두(黑頭)라고 별호가 있던 대승이 사자를 명하여 천왕봉하(현 탄현면 법흥리 산78) 약산동 후산 중턱에 사찰을 창건 검단사(黔丹寺)로 명칭하고 강화(江華) 전등사(傳燈寺)를 자주 왕래하면서 불씨를 구해왔다고 한다.
1731년(조선 영조7)에 장릉(인조대왕)을 운천리에서 천봉할 때 송리산 중턱으로 이전하고 장릉 제향시 제수 중 두부(豆腐)를 만들어 제 공하였다 하여 두구사(豆拘寺)라고도 칭하였다 한다.
검단사에 있는 석불은 검단도사의 작품이라 전해지며 이 석불은 등신좌상(等身坐像)으로 1,00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노천에서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금산리 보현암으로 이전 보존되고 있다 하며 검단사에는 높이 3자의 금부처가 있었으나 황해도 개풍군 죽면에 사는 해적들이 훔쳐 팔아먹으려 하였다가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자 팔지 못하고 도로 반환하였다 한다. 그 동안 여러 대사가 번갈아 조계종에서 드나들었으며 국난으로 회진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되었으며 박법혜 주지스님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오래된 사찰이다. [펌글]
산행을 모두 마치고 고향 후배 유현우(인홍)부부가 벌판 농지에 육모정으로 지은 정자에서 12명 일행과 두부부가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농촌체험 만찬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헤어지기 섭섭해 하는 일행들 너도 나도 한 목소리로 약산 산행도 좋았고, 현우 부부가 진수성찬으로 차려낸 만찬이 아주 특별히 좋았다며 다음에 다시 한번 더 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이날 청파와 함께한 약산(198m) 산행을 모두 마치고 귀가길에 든다.
'☎일어나라대한민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 어찌 잊으랴 3.10 그날의 통한(痛恨)을... (0) | 2017.06.22 |
---|---|
제62회 현충일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이승만 대통령 묘역" 참배 (0) | 2017.06.07 |
자랑스런 대한민국 5년 “農心成事” 꿈은 물건너 갔다 (0) | 2017.06.02 |
기호6번 새누리당 조원진 후보 서울시청앞 유세에 수십만 인파몰려 환호 (0) | 2017.04.22 |
기호 6번 조원진 후보 시청앞 유세장 수십만 인파 몰려 붐벼 (0) | 2017.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