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정(花石亭)은 왜 불탔나

2016. 11. 3. 23:42☎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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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花石亭)은 왜 불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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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정(花石亭)은 왜 불탔나?

 

나는 오늘 (2016.10.21.) 저와같이 활동하는 부평 시니어 기자단 일행들과 내 고향 파주 파주시 파평면 화석정로 152-72에 위치한 화석정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1974.09.26 지정) 된 화석정을 찾았습니다.

 

화석정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후 폐허 되었다가 율곡 이이 선생님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1443)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하였고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다가 율곡선생께서 다시 중수한 유서깊은 곳입니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갔으며 야간에는 어부들의 고기잡이 등불이 휘황찬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6·25한국전쟁이후 줄곧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는 곳입니다. 화석정에는 지금도 느티나무가 자리하며 화려했던 옛 시절의 흔적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당시 율곡 선생은 제자들과 화석정을 찾아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훗날 임진왜란(선조 25, 1592)으로 인한 외침을 피해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29일 밤) 억수같이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임진강을 건널 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자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질러 선조가 탄 배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에도 율곡은 나라에 일이 있을 때 마다. 화석정을 찾았으며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아예 여생을 이 곳 화석정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며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그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칙사(勅使) 황홍헌(黃洪憲)이 찾아와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는 설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화석정은 임진왜란때 불 타 없어진후 80여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 14(1673)에 율곡선생의 증손 이후지(李厚地) . 이후방(李厚坊)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때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初翼工)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八歲賦詩> 가 걸려있다.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에 세워진 화석정은 지금도 많은 관람객들이 찾아 그 옛날 역사를 기리는 곳으로 알려졌다.

 

八歲賦詩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숲 속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 聲斷暮雲中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저녁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소리

 

#. 이밖에도 서기정, 권남, 정철, 송시열 등 많은 문인들이 여기서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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