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묵동 애국 열사" 이야기 / 추모비 제막식 [사진]

2010. 12. 4. 10:50☎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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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에 다녀와서


"성삼문 선생"께서 개울물을 먹물로 물들일 정도로 열심히 먹을 갈아 공부하여 "생원 급제"하여 '개 묵'이라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금곡1리에서는 지난 (2010.11.29 14:30) 올해 들어 첫눈이 내린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 금곡초등학교 교정에서 6·25 당시 "개묵이 반공애국청년단"을 조직하여 북진하는 우리 국군과 UN군을 환영하고 한편 "국군 낙오병"을 도우려고


문산 중, 고등학교 교감 김사종 (52세), 수학 교사 김재설 (30세), 축산담당 교사 엄태석, 천현국민학교 금곡분교 교사 김종묵(29세) 교사 장렬, 교사 장유근 외 장세 순, 김영묵등 (사망자 8명)님들께서 주축이 되어 "태극기 제작"과 우리 국군 낙오병을 돕다가 북한군 내무서원에 발각되어 총살을 당하셨다.

 

이분들 (김사종, 김재설, 엄태석, 김종묵. 장렬, 장유근, 장세순, 김영묵, 신태순) 9명에대한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이 (파주지역 각계 인사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공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를 기습하려 했다가 생포) 되었던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 목사"의 "새로운 반공의식 고취" 차원에서 참석, 그리고 지역 주민들이 금곡초등학교 교정을 가득 메운 가운데 25사단 육군 군악대의 연주에 따라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번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 있기까지 지난해 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그 당시 처절했던 순간을 돼 새기고 국가를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치셨음에도 불구 고인들의 희생정신이 빛바랜 채 묻혀 있음을 안타까이 생각한 "문산 중고등학교동문회"와 고인이 되신 김사종 선생님의 제자이신 김호기 전 파주중 교장(82) 박윤호(80) 이효종(80) 그리고 김호기 선생님의 제자이신 쇄꼴마을 김 교화 촌장(67)이 주축이 되어 사건 당시 유일한 생존자이신 (김성묵 씨 78) 증언을 토대로 자료 수집을 하고


고인이신 전 문산 중, 고등학교 김사종 교감 선생님의 아들이신 김서기(68) 씨로부터 그간 보관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근거 자료를 토대로 희생당하신 9분에 대한 애국 열사 추모비 건립을 하기로 뜻을 모아 각계 서명과 함께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2010년 11월 29일 뜻깊은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이날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하신 김서기 씨(68)는 돌아가신 아버지 (김사종씨)는 일본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셨고 6·25 전쟁 때는 애국 운동을 하시다 돌아가셨다고 말을 이으며 아버지의 제자분들과 지역의 뜻있는 분들의 협조로 오늘과 같은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을 갖게 되어 늦었지만, 하늘에서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이라며 목이 멨다.


앞으로도 "개묵동 애국 열사 추모비 제막식" 추진위원회에서는 선열들의 업적과 약력을 지속적으로 발굴 기념사업회를 만들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애국 열사 분들이 국가로부터 "보훈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 한다.


1950년 6.25 북한의 남침 당시 문산 농업 중, 고등학교 교감 김사종 선생님께서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금곡1리)에 거주하는 제자 장세 문씨댁으로 동료 교사 (김재설, 엄태석)과 함께 피난와 사실 때 "천현초등학교 금곡분교" 교사 3명(김종묵, 장렬, 장유근)과 친교를 맺어 지내던 중 과거 "김사종" 교감 선생과 금곡분교 교사 "김종묵 씨"의 제안으로 비밀 지하조직 "개 묵이 반공애국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그 후 전쟁으로 낙오한 국군 병사 돕기, 인근 마을 주민 반공정신 계도, 태극기 제작 등 활동을 하다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수도 서울 수복 소식을 듣고 "개 묵이 반공애국청년단"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1950년 10월 3일 "북진하는 국군"의 사기를 북돋우려고 "김성묵"씨의 행랑채에서 "반공애국청년단"원들과 함께 "태극기" 제작을 하며 또 한편으로 얼마 후 있을 "UN군 환영식" 준비를 하던 중 북한군 내무서원에 발각되어 사살당하고 대원 1명은 "금곡리 토끼 울"에 숨어 있던 "낙오된 국군"에게 음식을 제공하다 사살당했다


유일한 생존자 "김성묵"님의 증언


6·25 당시 "천현초등학교 금곡분교" 교사로 재직하시던 큰 형님(종묵)과 함께 개묵이로 피난오신 문산 농업 중, 고등학교 교감 "김사종" 선생님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 묵이 반공애국청년단"의 대 원간 연락과 잔심부름을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1950년 10월 3일 생존자 "김성묵 씨 (당시 19세)" 집에 모인 "반공애국청년단"원들은 북진하여 올라오는 우리 국군 환영행사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에 열중이었는데 우연히 집 밖으로 나왔더니 길 건너언덕 수풀 사이에서 우리 집을 엿보는 수상한 사람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어


마침 화장실에 가는 대원 중 한 분에게 이 사실을 말씀드리고 나오는데 갑자기 여자가 낀 5 ~ 6명이 따발총을 들고 나타나 "우리는 국군 패잔병"이라고 소리치며 우리 집으로 오고 있어 나는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밭으로 도망을 치다가 그 중 한 명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리고 뒤쫓아온 일당이 '너 공산당이냐?' 하고 묻기에 '그렇다 나는 공산당이다.'라고 대답하자 일당은(내가 자신들이 국군 패잔병이란 소리를 듣고 도망간줄로)알고 나를 버려둔 체 집안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그리고 있던 대원 모두를 끓고 나와


개 묵이 고개 넘어 '청방대장' 집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데리고 간 후 그들은 대원 8명 전원을 "안개 묵이 고개 너머에서 사살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북한 내무서원들은 이날 산 너머 '금곡리 토끼 울'에서 낙오된 국군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던 대원 "신태순"을 먼저 사살하고 '개 묵이'로 몰려와 태극기를 그리던 대원들을 총살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약장수를 하는 나의 외삼촌이 가방과 짐을 들고 우리 집에 오시다 역시 그놈들에게 총살을 당하시기도 하였다. 그 후 2일 만에 나는 북진하여 온 미군의 도움으로 총상 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김성묵(73) 씨는 등이 굽은 "곱사등이" 장애인으로 개묵이 마을 옛날 그집에 살고 계신다. (고인 중 김종묵, 김영묵 두 분은 유일한 생존자 김성묵의 형님)이시다.

 

개묵동 애국열사 제막식

  

 

 제막식에 앞서 추모제 준비

 

 

 제막식에 앞서 추모제 준비

 

 

 곱사등이가 되신 장애인 김성묵씨의 산증언을 듣는 시간

 

 

 

 

 1.21사태 당시 북한군 부대 요원으로 청아대를 급습하였다가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 목사께서 새로운 반공의식 강화에 대한 연설을 하고 있다.

 

 

추모비 제막 행사에 참석하신 각계 인사와 주민들 

 

 

추모비 제막 행사에 참석하신 각계 인사와 주민들 

 

 

추모비 제막 행사에 참석하신 각계 인사와 주민들 

 

 

추모비 제막 행사를 위하여 연주를 하여준 25사단 군악대

 

 

쇄꼴마을 김교화촌장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기까지 경고 보고 

 

 

 추모비 제막

 

 

 추모비 제막

 

 

 제막된 추모비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하신 지역 유지분들 기념촬영

 

 

25사단 군악대와 함께

 

 

개묵동 애국열사 추모회 발기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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