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전 빛바랜 우리 부부 결혼사진을 복원하다.

2010. 9. 2. 20:42☎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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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전 빛바랜 우리 부부 결혼사진을 복원하다.

변질되어 버릴 빛 바랜 사진을 복원하다.
윤도균 (ydk3953)

 

   
▲ 성철경 주례 선생님과 함께 결혼식을 마치고 성철경 주례 선생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 윤도균
성철경선생님
 

빛바랜 사진으로 본 우리 부부의 결혼 이야기
 
오랜만에 시간이 있어 문갑서랍 깊숙이 처박아둔 지난 시절 앨범을 열어보니……. 세상에 ~~~~ 앨범에 들어 있는 모든 사진이 다 소중하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부부의 결혼식 컬러사진은 이미 그 빛깔이 변형되어 조금 더 버려뒀다가는 우리 부부의 결혼식 사진이 영원히 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래져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다행히 흑백 사진은 그나마 보존 상태가 그만한데 문제는 이미 40여 년이 다된 앨범이다 보니 사진을 끼운 비닐이 압착 되어 공기가 통하지 않아 사진 보관 상태에 문제가 심각했다. 그런데 만약 이 사진들을 그냥 더 두었다가는 우리 부부의 결혼식 컬러 사진은 버려 버리게 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를 한다.
 
다시 앨범을 사다 사진 정리한다 하여도 보존 기간을 보장할 수도 없고 또한 새 앨범에 다시 끼어 정리한다 하여도 어차피 요즘 세상은 사진이 넘쳐 나는 세상이다 보니 우리 부부 아니면 누가 들춰보지도 않을 사진을 다시 앨범을 사 정리한다 하여도 훗날 자식들이 그 옛날 "고려 쩍 엄마, 아빠 결혼사진" 앨범을 꺼내 보는 일이 쉽지 않을 듯 생각되어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얼마 있으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인터넷망을 이용하여 온라인에 사진을 마음대로 올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사진을 이대로 내버려뒀다가 더 나이 먹어 손 굼뜨고 판단 흐려지면 어려우니 더 나이 먹기 전에 맘먹고 이 빛바랜 사진들 내 손으로 복원(스캔작업)하여
 
내가 "카페와 블로그"에 사진 앨범을 만들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화질도 선명치 않고 사진 상태도 변질하여 좋지 않은 사진들이지만 한 장 한 장 정성껏 스캔작업을 하여 재탄생시켜 놓으면 수십 수백 년이 흐른다 하여도 이 사진들이 더 이상은 흉물스런 모습으로 변형되지 않을 것이기에 꼬박 이틀이나 걸려 우리 "부부의 빛바랜 결혼사진" 백여 장을 온라인에 복원(스캔)시킬 수 있었다.
 
물론 복원한 사진들이 어떤 사진들은 지나치게 사진이 변질하고 좀까지 쓸어 사실상 사진으로서의 구실을 다하기 쉽지 않지만, 우리 부부에겐 그 어느 한잔의 사진도 순간순간이 모두 소중한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아닌 것이 없어 내 딴에는 온 정성과 공을 들여 복원을 시켜 보았는데 아무래도 100%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 실력으로 이 정도 수준의 "빛바래 버려질 정도의 사진"을 재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상당히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라 자부하며 "청파 윤도 균과 김정애"의 "빛바랜 결혼사진"을 재현시켜 본다.
 
   
▲ 웨딩마치따라 신부를 데리고 입장하신 장인 어른 신부 입장 순서에 따라 장인 어른께서 신부를 데리고 웨딩마치에 마춰 입장하시고 계신 모습
ⓒ 윤도균
신부입장
신부입장 
그런데 우리 장인 어르신 어쩜 이리도 젊게 보이세요. 장인 어르신 감사 합니다. 소중하게 키운 도영할마이 저에게 시집 보내려고 이북에서 피난 나오셔 생선장사 하시며 애지중지 키우신 큰 따님을 가진 것이라고는 "부랄 두 쪽"밖에 없는 저에게 보내셨는데 큰 사위란 놈이 변변치 못해 장인 장모님께 큰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님 두 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 장인 어른께 신부 인계받아 장인 어르신이 데려온 신부를 날렵하게 채 가지고 주례석으로 가는 나와 아내 ㅋㅋㅋ
ⓒ 윤도균
주례
장인 어르신이 결혼행진곡에 맞춰 나에게 데려온 도영이 할머니를 마치 납치하듯 낚아채 주례선생님 앞으로 데리 가는 나 아니 그런데 어쩌면 도영할 베도 할머니도 둘이 바람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정도로 갈비씨였단 말인가?
 
   
▲ 성언선언문낭독 성철경 주례선생님께서 "성혼선언문" 낭독을 하시는 모습
ⓒ 윤도균
성혼선언문

1975년 3월 30일 (일요일) 정오 그날따라 유난히 봄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경기도 파주시 소재 "파주 금촌 예식장"에서 우리 부부는 우리 부모님과 이웃에 살면서 형님 아우 하시며 지내시던 그 시절(파평초등학교 성철경 교장선생님)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부부의 결혼 주례까지 서주신 그 성철경 교장선생님을 우리 부부는 결혼 후 신혼살림이라고 차렸지만 "똥구멍이 찢어지라 가난을 달고 살아야 했던"관계로 우리 부부는 그만 "성철경 주례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도 부모님께서 생존하여 계시던 시절에는 부모님들끼리 연락을 하시며 자주 만나셔 만남이 자연스럽게 "성철경 선생님" 안부 소식을 들을 수 있었었는데…. 두 분 부모님, 그리고 "성철경 선생님"께 공부하신 손위 두 형님까지 돌아가시고 나니 현재의 나로서는 성철경 선생님의 근황을 아예 모르게 되었다.

 

아마 "성철경 선생님"께서 생존하여 계신다면 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연세이셨으니 100세는 되셨을 텐데……. "성철경 주례 선생님"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주례 말씀 따라 오늘 우리 부부가 이 세상에 두 아들 낳아 나름대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 이루며 잘살고 있는데……. 선생님 죄송합니다.

 

   
▲ 우정반지를 끼워주는 친구 그러나 친구가 끼워준 반지는 결혼식이 끝나고 다시 돌려주고 친구들은 나중에 나에게 "우정반지"를 만들어 주기로 하고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윤도균
우정반지

 

나에 총각 시절 농촌생활 친구 모임 중 "두더지 회라는 친목회"가 있었는데 그 시절 우리 모임은 결혼하는 친구들에게 항상 금반지 3돈씩을 만들어 신랑에게 선물로 끼워주곤 했는데 어쩌다 친목회에서 내가 제일 늦게 결혼을 하다 보니 친구 녀석들은 벌써 결혼하여 아들딸 낳아 "둘 반지"까지 다 챙겨 주었는데,

 

그 친구 녀석들 먼저 결혼하더니 "똥 누러 갈 때 다르고 올 때 다른식"으로 이런저런 핑계로 하나, 둘 빠지기 시작하더니 나 결혼할 때는 친목회 회비가 바닥이나 정작 맨 나중에 결혼하는 나는 자금이 부족하여 그 "우정의 반지"를 끼지 못할 처지가 되자 친구 녀석들 임기응벽식으로 우선 먼저 결혼한 친구 반지를 나에게 끼워주고 나중에 새로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그 나중이 결혼 40여 년이 가까워 오도록 미루더니, "결국 나는 결혼식 날 친구가 반지 끼워주는 사진만 형식으로 찍고" 반지는 도로 뽑아주고 이날 이때까지 그 반지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그렇다고 40여 년이 다 된 지금 그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 아마도 친구 녀석들 새까맣게 잊고 있겠지…….

 

에라 이 나쁜 친구놈들아! 그래도 너희 생각날 때면 훌쩍훌쩍 보고 싶지만, 네놈들이 전화를 안 하니 나 또한 전화 한번 못하는구나 보고 싶다. 친구들아 ~~~~~ 항상 건강 유의하며 오래오래 잘들 살아라.

 

   
▲ 장능에서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자유로 드라이브"를 마치고 이조 16대 인조대왕능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 윤도균
장능

런데 우리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형편 사정으로 신혼여행을 못 가고 버스회사 임원이신 큰 형님께서 내 주신 대형 버스 한 대에 이날 결혼식에 참석한 신랑 신부 친구들을 모두 다 태우고 "드라이브"를 한다고 자유로 임진각을 돌아보고 집으로 귀갓길에 파주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이조 16대 인조 대왕릉에 도착하여 친구들과 기념사진 찍고 친구들과 헤어지고  …

 

그때 나는 신혼여행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하여 이다음 돈 벌어서 신혼여행 못 간 것 대신 나중에 "구혼 여행' 가자고 해놓고 큰 아들놈이 36세 작은 아들놈이 31세가 다 되도록 몇 번의 여행은 다녔지만, 명분 있는 "구혼 여행"은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여보 도영이 할머니 나 아직도 그 약속은 잊지 않았으니 그리 멀지 않은 날 꼭 약속 지킬 테니 희망을 버리지 말기 바라오.

 

   
▲ 동네 친구들과 결혼 피로연 장면 한 마을 친구들이 결혼식날 저녁에 피로연석에서 선물을 전달받고 있는 장면
ⓒ 윤도균
피로연

결혼 당일 저녁은 또다시 동네 친구들이 마련해준 "피로연"이 벌어졌는데 이 자리에서 한마을에서 자란 부랄 친구들이 우리 부부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있다. 자세히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시계도 있었고 거울도 있었고 그리고 또 몇 가지가 있었다.

 

   
▲ 우리 부부의 약혼사진 선볼때 아내 얼굴 한번 보고 우리는 약혹식날 다시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자칫 뜬 혼인같아 걱정했을텐데, 그 시절엔 부모님 말씀을 천륜으로 아로 우리는 결혼을 하였다.
ⓒ 윤도균
윤도균

   
▲ 청파의 결혼사진 동영상 결혼사진 수십장을 한데 모아 사진 동영상으로 만들어 보았다.
ⓒ 윤도균
결혼

빛바랜 이야기를 쓰려면 먼저 우리 부부의 첫선 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1975년 1월 5일 그때 내 나이가 32살이었다. 그 시절 서른둘이면 아마 요즘 시대 차원으로 보면 아마 사십 노총각들과 맛 먹을 정도로 노총각치고는 한 까닥지 할 즈음이었는데 그래도 여기저기서 선보라는 중매가 꽤 여러 곳에서 들어올 정도였으니 비록 노총각이긴 해도 그렇게 형편없이 "똥값 취급받는 노총각"은 아니었는데,

 

우리 누님과 아내의 처 고모님이 이웃에 "죽마고우 친구지간" 사이를 유지하시며 사시다 보니 나에겐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어느 날 겨울 얼음판에서 한창 스케이트를 신나게 타는 나에게 누님께서 동생 오늘 저녁에 텔레비전 보러 누나네 집으로 말을 오라고 하시어 왜 그러시는데요? 하고 여쭙니 그냥 한번 와봐 하시는 소리를 듣고

 

저녁을 먹고 누님댁에 말을 갔더니 그 시절 농촌에는 웬만한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는데 그때 누님댁은 서울 전파사에 근무하는 남동생이 소개하여 그 시절 가장 잘나가는 "금성 흑백텔레비전"이 있었는데 겨울 저녁 연속극 시간대만 되면 이웃 아주머님들과 아이들이 누님댁 안방 가득히 모여 텔레비전 시청을 하곤 하였는데

 

저 윗목에 처 고모와 함께 온 낯선 아가씨 한 사람이 보이지만 아마도 누님댁 이웃에 사는 처고모네 손님 온 아가씨겠거니 하고 그날 저녁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누님 말씀대로 텔레비전만 보고 집으로 왔는데 이튿날 누님께서 어제저녁에 본 아가씨가 어떻나? 는 난데없는 질문을 받고 아니 누님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슬쩍 보았을 뿐인데, 하면서 여운을 남기니

 

누님께서 그 색시가 누님 친구의 친정 조카딸인데 선을 한번 보라는 말씀을 하시며 언제 시간이 가능한지 날을 잡으라고 하여서 하는 수 없이 어차피 결혼을 안 할 것이 아니니 (1975.1.5)내가 서울로 취직하러 올라가는 날이 되어 서울 가는 편에 처가에 가서 선을 보겠다고 오막살이 처가 안방을 들어가다 그만 "꽝"하고 문틀에 이마를 부딪치는 수로를 당하고 쩔쩔매고 있는데,

 

웃기는 일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한쪽에 서서 "박장대소" 배를 부여잡고 킬킬대고 웃어 대는데……. 나 참 기가 막혀 성질 같아선 확 돌아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인데 이런 내 눈치 살핀 누님과 처고모님이 문을 딱 가로막는 바람에 꼼짝 못하고 그날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나는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말도 몇 마디 붙여 보지도 못하고 도영이 할머니(아내)와 약혼식을 치러야 하는 "코를 꿰고" 말았다.

 

그때일 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그러면서 생각나는 노래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누님과 처 고모님) 없었다면 "~~~~ 아마 그랬으면 울 도영할마이 아직도 시집 못 가고 노처녀로 썩고 있을지도 모를 텐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그때 문지방에 머리 부딪치고 뛰쳐나오지 않고 참은 일이 어쩜 상당히 잘한 일 같기도 하다 킥킥킥 한 여인 평생을 구제하여 줬으니 말이다. 킥킥킥

 

   
▲ 처가댁에서 기념사진 약혼식을 마치고 처가댁에서 기념촬영을
ⓒ 윤도균
약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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