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나의 아픔 과 남의 아픔
청파 윤도균
나의 큰 형님은 슬하에 딸 다섯을 두셨다. 그런데 형님이 집안의 장손이다. 보니 종손이란 책임감에 어쩔 수 없이 여섯째 아기를 갖게 되었는데 이미 다섯 딸을 낳은 경력이 있는 형님 내외는 행여 여섯째도 딸을 낳지 않을까 걱정되고 무엇보다 다섯 조카 아이들 교육 문제가 걱정되어 아무래도 여섯째를 낳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여 애초 계획을 바꿔 중간에 유산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대손손 유교사상에 물들어 살아오신 완고한 아버지께서는 “며느리가 시집와 집안에 손을 잇지 못하면” 조상님께 큰 죄를 짓는 것이라.” 시며 큰형님 내외께 여섯째를 낳을 것을 원하셔 형님 내외는 어쩔 수 없이 여섯째를 낳았는데 다행히 그 아이가 아들이었다. 그렇게 되니 형님댁은 한동안 축하 잔치 분위기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렇게 귀하게 태어난 우리 집 안 장조카는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 대한민국 남자라면 의무적으로 마쳐야 하는 병역의 의무를 위하여 “해병대에 자원(自願) 입대”를 했는데 “형님 내외분께서는 귀하게 낳은 막둥이” 아들이 대한민국 군인 중 가장 군기가 세고 힘이 든다는 해병대에 자원(自願)하여 고생할 것이 걱정되어 “노심초사”하시는 가운데 삼촌에게 입대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삼촌이란 사람이 고작 “형님 내외분께 위로라고 한 말”이 “대한민국 남자면 누구나 다 가는 군대”라고 “요즘 군대는 옛날과 달리 얼마나 좋아졌다는데” 두 분 괜한 걱정을 사서 하신다고 “건성”의 말을 했는데, 나중에 내가 한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차라리 “말주변 머리 없으면” 빈말하지 말고, 잠자코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조카가 입대하고 2년 뒤 이번에는 나의 큰아들이 입대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처지가 바뀌어 “아들의 입대일” 이 바짝바짝 다가오니 정작 군에 입대하는 아들아이는 태연한데, 아버지란 사람이 애가 달아 “할 수 있다면 아비가 아들 대신 입대하여 병역의 의무” 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렇게 아들을 군에 보내 놓고 아마 근 6개월은 마치 “가슴을 반은 도려낸 듯” 허전하고 텅 빈 마음이 되어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밥을 먹을 때도, 아들 또래 청년들을 보기만 하여도 가물가물 생각나는 아들 생각에 제대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들이 다른 집 아이들처럼 자상하여 부모와 애틋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아들에 대한 그리움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이루 해일 수 없을 정도로 오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훈련을 받는 부대장으로부터 곧 훈련을 마치게 되니 퇴소식날 부모님께서 내왕할 수 있으시면 오셔서 아들에게 손수 계급장을 달아 주라는 연락을 받고 이른 새벽 아내와 외할머니 외삼촌과 함께 훈련소에 도착하여 반가운 가족 상봉을 하고 훈련을 마치는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이등병 계급장”을 달아주고 와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찾아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유수와 같이 세월이 흘러 “형님댁 조카도 그리고 우리 아들”도 전역을 하고 어느 해 추석 명절 때 형님댁에 모인 자리에서 형님 내외분께 옛날 조카 입대할 때 경험이 없어 삼촌이란 사람이 형수님 아픈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건성으로 말씀을 드린 무례함을 사과” 드리며 형수님의 그때 심정을 내 자식을 입대시키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고 말씀드리니 형님 내외분께선 그때 동생의 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시며 그래서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죽을 때까지 배우면서 사는 것”이란 말씀을 하시던 형님 모습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이야기는 1960년대 후반 한마을에 사는 나의 절친한 친구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이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하고 합격 발표를 확인하신 결과 불합격된 것을 확인하시고 낙담하신 심정으로 돌아오시데 평소 “언제나 환하게 웃으시며 인자한”모습을 보이시던 아버지께서 입술에 “하얗게 겪지!”가 일어났을 정도로 불안하신 모습을 보이셔 이상한 예감이 드러나는 친구의 아버지께 무슨 일이신데 이렇게 입술이 타셨느냐고 여쭈니 다름 아닌 친구 동생이 고등학교 응시에 불합격해서 속이 상해 그렇다고 하시며 눈가가 촉촉해지신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나는 혹시 모르니 제가 다시 학교에 가서 확인하고 오겠다며 아버님께서 타고 오신 자전거를 되돌려 8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학교 “합격자 발표 게시판”을 꼼꼼히 확인하니 아버지 말씀과 달리 친구 동생은 당당하게 합격처리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헐레벌떡 친구 집에 도착하여
친구 아버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려니 이미 당신께서 잘못 보신 아들의 불합격 사실에 속이 상할 대로 상하신 아버지께서는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싸고 누워 앓는 소리를 하고계서 나는 큰 소리로 “아버지 홍재가 불합격이 아니라 합격”했다고 말씀을 드리니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중병 환자처럼 시름 놓고 누워 계시던 아버지께서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생기발랄하신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정말이냐고 몇 차례를 확인하시더니 갑자기 주르르 눈물을 흘리시며 도균이 네가 확인하였으니 이젠 됐다고 하시며 나를 보고 몇 번이나 연거푸 고맙다고 치사를 하시던 친구 아버지의 환한 모습을 보며…….
도대체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이기에 저 정도로 집념하시는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 이미 40여 년이 지난 인제 와서야 그때 그 친구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집념”에 대하여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하늘나라에 편히 영민” 하세요.
대부분 사람은 우리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재미도 없고, 웃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눈물도 없는” 것으로 편견을 갖고 있지만 “무뚝뚝한 아버지 마음속엔” 언제나 더 큰 사랑의 둥지 속에 거느린 가족들이 편히 함께 할 수 있는 따뜻한 군불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아버지 눈엔 눈물은 없지만, 그 아버지 술잔엔 눈물이 반이다.”란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란 시가 이 시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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