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어머님의 빛 바랜 사진을 복원
오늘(2010.7.28,수)은 어머님의 20주기 기일였어요. 지난해는 손아래 남동생네 가족이 사정으로 어머님 기일에 참석치 못하였고 또한 우리 가정을 대표하는 큰 형수님께서 우환으로 멀리 사는 딸래집에 거하며 병원 진료를 받고 계신 관계로 부득이 셋째인 우리집에서 "어머님 기제 추도예배"를 모시기로 하고 준비를 하는데 하필이면 이날따라 두 아들 아이들도 바쁜 회사 업무로 출장중여서 어쩔 수 없이 우리 두 내외와 손자 아이 셋이서 "어머님 19주기 기제 추도예배"를 모시려는데
뜻밖에 출가한 막내 여동생이 매제와 함께 친정 어머님 기제에 참석하여 여동생 내외와 우리 부부, 손자 아이 이렇게 5명이 "어머님 기제 추도예배'를 모시게 되어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왜 그렇게 죄송하고 허전한 마음에 왜 그렇게 설음이 복받쳐 오르던지요. 차마 여동생 내외가 자리해 하여 가까스로 울컥 쏟아지는 눔물을 참았지만 정말 지난해 어머님 기일 그날 그 자리가 너무도 가슴 아려 올해도 내심 걱정을 하고있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 큰 형수님께서 전화로 건강이 그런대로 완만하니 걱정하시지 말고 서방님 저녁에 "어머님 20주기 추도예배"에 가족들과 함께 오시라는 말씀을 듣고,
어머님 영정사진
왜 또 그렇게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리던지요. 내가 왜 이럴까? 이러지 말자고 이래서는 안된다고 수도없이 자책을 하면서도 왠지 자꾸 아주 작은 사소한 일들에도 감정이 앞서 눈물이 나니 ... 부모님 슬하에 6남매가 모두 함께 했을땐 그 다정 다감했었던 손위 (큰 누님, 큰형님, 작은형님) 생각이 주마등처럼 그리움이되어 목화 구름처럼 화사하게 스처 지나 갑니다. 그땐 두 형님들이 계셔서 적어도 내가 오늘처럼 이렇게 앞에서 걱정하지 않고 그냥 형님들 하시는일 거들기만 하면 됐었는데... 이젠 가정사 매사 하나 하나 마음이 가고 자유롭지 못하고 걱정되는일들이 많은지요.?
그런데 올해는 꼭 계셔야 할 자리에 형수님께서 굳건히 지켜 주시니 한결 마음이 가볍고 날것처럼 기쁘기 짝이없네요. 이런 내 마음 알기나 한것처럼 올해는 어머님 기제 추도 예배일에 큰 형님댁에 모인 가족들이 남동생네 (3명) 그리고 큰 형님의 자녀들중 시집간 두 조카딸네 가족 (4명) 우리가족(4명) 그리고 형수님과 장조카(2명) 모두 (13명)이 모여 "어머님 20주기 기제 추도예배"를 모실 수 있어 올해는 얼마나 마음이 기쁘던지요. 무엇 보다도 친정집 할머님 기일 잊지 않고 생존해 계실때 할머니 생각 난다며 할머님 기일에 참석한 조카딸들과 가족들이 너무 대견합니다.
아버지 영정 사진
우리 부모님께서는 6.25 사변으로 피난 나오셔 (1952, 9, 28 )수복때 함께 피난오신 고향분들은 모두다 고향으로 귀향을 하셨는데 우리 우리집은 어머님 친정 마을이며 우리들에겐 외가댁 마을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약산동에 그대로 자리잡고 둥지 틀고 살기 위하여 부모님은 외가댁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다 쓸어저 가는 오막살이 헌집을 구입하여 헐어 내시고 그 자리에 아담한 새 담집을 지어 우리 가족 7-8식구가 비좁은 단칸방에서 복작 거리며 마치 병아리처럼 엄마품을 비집고 살았어요.
그도 그럴것이 2년여 세월을 아버지께서는 처가살이를 하셨으니 말이 처가댁이지 내성적이시며 곧은 심성을 가지신 우리 아버지 속맘이 얼마나 불편하셨겠어요. 그러다 당신 손으로 손수 지은집이시니 얼마나 감격이셨겠어요 그러니 덩달아 우리 자식들야 다소 비좁고 협소한 담집이었지만 비좁다는 생각보다 이 세상 그 어느나라 "구중궁궐" 보다 더 근사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내집으로 얼마나 좋던지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의 기쁨이었어요.
그렇게 새보금 자리 담집에 살게 되면서 부모님은 늘 낮에는 하루종일 들판에에서 허구한날 품팔이 고단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 오시면 피로함도 잊으시고 아버지는 그 어느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희미한 석유 등잔불 심지 돋우시며 우리들에게 열심히 책을 읽어 주셨어요 어린 나이에도 늘 아버지께서 귀가 따갑도록 읽고 또 읽어 주시던 (심청전, 장화홍련전, 춘향전, 수양대군반정기 등) 많은책 내용들을 줄줄이 외울 정도였어요.
그러다 어느날은 아버지가 읽어 주시는 소설책 내용에 감동하여 어린 마음에 얼마나 울었던지요.... 그런대도 늘 "내유외강 [內柔外剛]" 하신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시려 우리들 보는앞에서 단 한번도 눔물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은 가슴으로 울고 계셨어요. 하지만 저는 그때 어머니가 뒤돌아 흘리시던 그 어머니의 굵은 눔물 방울을 여러번 보았어요. 그래서 난 그런 엄니 모습보면서 너무도 마음이 아퍼 " 이 다음 내가 커서 가정 꾸미고 살면 울 어머님 모셔다" 천년만년 살고지고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입술을 깨물곤 했는데,
부모님께서 피난나오시기전 사시던 고향마을 풍경
불쌍한 울 엄니 "천년만년"은 고사하고 내가 어렵게 내집 마련하여 살게 되었을때 언제 한번 모셔다 변변히 따스한 밥 한번 제대로 지어드리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울 엄니 아부지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하늘길을 훠이훠이 떠나셨어요. 그 시절 울 아부지 엄니께서는 자식들집에 한 번 오시는것도 어려운 자식들에게 폐끼치는일이라 생각을 하시며 왕래를 참고 안하셨는데 .... 지금 생각하여 보면 정말 울 엄니 아버지께서 자식들집에 오고싶지 않으셨겠어요. 그 생각하면 내가 성장하여 자식 키우는 입장되어 울 엄니 아부지의 그 자식 걱정 사랑이 왜 그렇게 한으로 남는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예 셋째야 애비가 엄마가 얼마 정도의 용돈이 필요한데 하고 요청을 하셨었으면 오늘 이렇게 부모님에 대한 죄스런 후회가 오래 가지 않을텐데....울 엄니 아부지는 비록 체구는 작으셨지만 그렇게 마음이 바다처럼 넓고, 인품이 하늘처럼 드 높은 그런 분들 이셨어요. 다만 울 엄니의 배움이 짧으셔 답답한 세상을 사셨지만 그래도 울 엄니께서는 당신의 확실한 가치관과 확고부동한 가족관을 바탕으로 우리 자식들을 가르치셨고,
가난한 아부지는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하여 3번이나 이사"를 하며 "맹모삼천지교"의 탁월한 교육관을 보이며 후세에까지 모범이 되셨듯이 우리 아버지께서는 피난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당신 자식들 내일을 위하여 아버지 평생동안 사시사철 그 어느날 하루 거르는날 없이 언제나 낭낭하신 목소리로 열심히 책을 읽어 주시던 그 모습이 아버지의 사랑이란것을 새까맣게 몰랐어요. 그런데 어느덧 '낼 모래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거짓말처럼 아버지 사랑의 흔적을 알것 같이 생각이 들며 불현듯이 아버지 생각이 나며 언제나 변함없이 낭낭하신 목소리를 책을 읽어주시던 아버지 글 읽으시는 소리를 "환청처럼 또 어떤때는 독경처럼" 들릴때가 더러 있어요.
그럴때면 나도 모르게 뼈가 사무치도록 그리운 아버지 어머님 생각에 사무실문 걸어 잠그고 싫컷 울어 버리곤 하지요. 그리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맘이 편안하고 마치 부모님을 뵌것처럼 몇 일은 그렇게 푸근합니다. 남들처럼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주시지는 못하셨지만 울 엄니 아부지는 우리 자식들 가슴에 언제나 '한 손엔 책, 그리고 또 한 손엔 농기구를 들고 계신 아버지 모습상"으로 기억에 남아 그 어떤 물질적 유산 보다도 더 소중하게 뿌리내려 자식들 살아가는 세상에 든든한 근간이 되고 힘이 되어 주셨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자식들도 늘 책을 가까하게 되었고, 그 결과 어느 누구 한 자식들이 뚜렸이 내세울만한 자랑 거리는 없어도 하나같이 모두 반듯하게 성장하여 "가화만사성" 화목한 가정을 이끌며 형제자매지간 우애있게 잘 살고 있는 오늘이 있기 까지에는 모두 울 어머니 아부지의 "맹부삼천지교" 정신 교육 덕택이라 생각을 하며 머리를 숙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감사 합니다.
그리고 큰 형님 ! 죄송합니다.
어머님 기일 바로 전날이 형님 기일이셨다는데 ... 불과 어머님과 이틀간 간격으로 기일이 겹쳐 부득이 형님 기일을 어머님과 한 날로 모아 "어머님과 형님의 기제 추도 예배"를 합동으로 모시게되었습니다. 형님 부족한 아우를 너그러히 양해 하세요. 그리고 아무쪼록 큰 형님 하늘나라에서 "부모님과 작은형"과 함께 이승에서 못 이루신 형님의 꿈 소원 이루시며 더 아름답고 행복한 영생을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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