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호] 진실한 벗은 제2의 자기다 ··· 친구 부부와 함께 분단 조국의 현장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탐방을 하다

2021. 11. 2. 21:44☎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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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사

 

당시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한 395 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가 되어 중공군과 국군의 치열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하에 1952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제9보병사단 정면으로 포진한 중공군 제38군 예하 113, 114 보병사단의 예비 부대로 제112보병사단이 후방에 대기 중이었다.

 

이를 간파한 김종오 소장은 1952922일 좌측 전방의 395 고지에 임익순 대령의 제30보병연대, 우측 전방에는 김봉철 대령의 제29보병연대를 전개시키고 이주일 대령의 제28보병연대를 예비 부대로 하여 유사시 양 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해 전부일 대령의 제51보병연대를 대대 단위로 분산시켜 평야 일대에 위치한 취약한 주저항선 방어를 강화하였다.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10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106일 시작됐다.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다. 그러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다.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 닌호아·투이호아·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다음백과 참조]

 

일 시 : 20041031일 일요일

다녀온길 : 자유로 ~ 오두산 통일 전망대 ~ 철마는 달리고 싶다 임진각 ~ 연천 ~ 전곡 ~ 백마고지 ~ 철의삼각지(김화&철원), 사창리, 포천, 광덕산, 백운산 ~ 포천 이동갈비촌 ~ 은잔디목장

함께한사람 : 4(친구 부부와 우리 부부)

 

진실한 벗은 제2의 자기다 ··· 친구 부부와 함께 분단 조국의 현장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탐방을 하다 

 

1960년대 중반 나는 친구(노윤호)와 약속을 했다. 낙후되어 잠자는 농촌을 계몽 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농촌에 뿌리내려 함께 이상 농촌 건설의 선구자가 되자고 떡먹듯 약속을 했었다. 그때 그 친구는 지금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객현리 감악산 기슭에 은잔디 목장을 경영하고 있다.

 

그런 친구에게 어느날 전화가 왔다. ‘아니 자네는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겨, 나는 이 때나 저 때나 자네 오기만 몇 날 며칠을 목 빼고 기다렸는데, 코빼기도 한 번 안 보여 주고 한 해를 무심코 넘기려 하냐고 묻는다.

 

친구의 전화를 받고 보니 정말 올 한해는 내가 무엇에 정신이 팔렸었는지, 매년 일년에 3~4번은 꼭 친구의 농장을 방문해 한동안 나누지 못한 못다한 이야기 나누며 회포도 풀고 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정말 친구의 말처럼, 그 놈의 산바람이 났는지 아니면 친구 보다 더 좋은 님이 생겼는지, 영락없이 꼭 무슨일이 있었던 것처럼, 안면 바꾼것처럼 산것같다. 친구에게 열 번, 백번 푸념을 들어도 당연하고 내가 잘못한 일이다.

 

일편단심 한 마음으로 나를 생각하는 친구의 우정에 내가 많이 소홀했다. 생각해보니 두고두고 미안한 일이다. 그런데 이때다. 저녁상 머리에 아내가 말한다. ‘여보, 이제 아이들 힘든 시험도 다 끝났는데, 여보 우리 이번 토요일 친구네 농장에나 한번 다녀 옵시다.’ 하고 제안 하며, 혹시 당신 산행 계획 있냐고 묻는다.

 

다행이 이번 토요일은 산행 스케쥴이 비어있다. 그 바람에 우스게 소리로 떡본김에 제사 지낸다.’고 서둘러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그러자 친구 부부 한 목소리로 쌍수를 들어, 환영해 반기며 어서 빨리 군소리 하지 말고 달려 오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나에겐 부끄러운일은 아니지만, 친구의 말처럼 시도때도 없이 생각난다고 달려갈 입장이 안된다. 그것은 바로 아내가 50세가 넘은 나이에 늦깍기 중, 고등학교 공부를 하는 학생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내의 공부가 끝날때까지 둘이 함께 길을 떠나는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내 주위 산친구들과 부부동반 산행을 떠나는날이 있을때도 나는 부득이 나홀로 참석을 할때가 많았다. 그래서 농담 좋아하는 아우들이 나를 보고 형님 혹시 홀아비아니냐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생각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멀쩡히 살아서 늦깎기 공부에 열중인 아내를 두고, 아내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 조금은 아내에게 미안했기 때문에 말을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홀아비라니... 그동안 말은 안했지만 그럴 때 마다 나는 혼자 씩 웃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친구의 독촉 전화도 받았겠다. 또한 아내의 제안도 있겠다. 마침 잘됐다. 친구의 농장에 가 하룻 밤 묵으며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 나누며 회포도 풀고, 일요일은 두 집 부부 함께 근교 산행이나 하고 오자 생각하고, 토요일 오후 나에 애마(산타페)를 달려 한국의 아웃토반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자유로를 경쾌하게 달려간다.

 

가는길에 안보관광 삼어, 오두산 통일 전망대도 돌아보고, “철마는 달리고 싶다임진각에서 안보관광을 즐긴다. 그리고 오후 5시 지나 친구에 농장에 도착을 했다. 그런데 마침 친구 내외가 우유(젓소)를 짜기 위하여 준비를 하고 있다. 그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작업화를 신고, 친구의 농장일을 돕는다.

 

이는 내가 농촌 생활할 때 해본 가락이 있어서다. 내가 돕는일은 젖소의 배설물을 처치하는 작업이다. 몇 년전이다. 친구의 농장에 와서 이 일을 처음 시작 했을때는, 젓소의 배설물 작업을 하다 그 냄새가 하도 역해서 여러번 토를 할뻔했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힘든 일을 친구 부부는 매일같이 반복 한다고 생각을 하니, 신기하게 그후 나도 모르게 젖소 배설물을 치우는데도 토 하는 현상이 없어졌다. 우유짜는 작업은 근 2시간여에 걸쳐 진행이 된다.

 

이렇게 모든 작업을 마치고 우리 두 집 부부는 음식 솜씨 소문난 아주머니께서 차려내신 진수 성찬에, 두런두런 두 집 사람사는 이야기를 나며 거나하게 취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아들에게 운전을 시켜 6km를 달려 노래방까지 가서 스트레스를 날렸다.

 

그리고 친구네 농장에 귀가하니 자정이 지나고 있다. 친구 부부와 함께, 아주 모처럼 보낸 일박2일의 여정이 우리 부부에겐 오래오래 좋은 추억으로 달달하게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말이 농촌이고 농촌 사람이지, 내 친구 경우는 웬만한 도회지 사람들 보다도 더 몸 관리를 잘해 반듯하다. 그뿐 아니다. 그 넓은 농장 구석구석을 얼마나 깨끗히 정리 정돈을 하며 철저한 경영을 하는지 모른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넓고 넓은 축사를 들 보던, 작업실을 보던, 또한 집안을 들여다 보던, 그 넓은 농장에 파리 한마리 빈대붙어 살지 못할 정도로 철저히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

 

1031일 새벽 4시 반이다. 친구는 내가 자는 줄 알고 살며시 이불을 덮어주고, 새벽드리 우유를 짜기 위하여 옷을 입고 조심조심 방을 나선다. 그러나 난 이미 잠에서 깨어 친구가 언제 일어나나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나도 뒤 딸아 작업화를 신고 나의 담당 일손돕기를 위하여 나서니 친구는 펄펄뛰며 말린다. 걱정하지말고 더 자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친구의 말이고 내 성질이 아닌건 아닌 사람이라 그냥 손놓고 있는 성격이 아니다. 그렇게 친구의 작업을 돕고 아침상을 맞았다.

 

아침을 먹으며 친구가 말한다. 산정호수가 있는 명성산까지 우리 부부를 위하여 원정 산행을 제안 하지만 나는 이미 명성산을 얼마전에 다녀 오기도 했지만, 그곳을 다녀와 집으로 돌아오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탐방을 제안하니 친구도 동의 한다.

 

식사를 마치고 친구의 차로 달려가며 친구가 말한다. 백마고지 들렸다 내친김에 철의 삼각지 김화, 철원, 사창리 까지 장거리 안보견학을 시켜주겠다면서 달려간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 힘든 농장경영 하면서 우리 부부를 위하여 장시간에 걸쳐 운전을 하겠다는 친구가 너무 고맙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차로 아침 9시 친구의 집을 나서, 강원도 철원에 소재한 백마고지를 향하여 달려간다. 그런데 이곳은 최전방 지역이라서인지 일요일인데도, 도로에는 내차 한대만 달리고 있다. 차창밖으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치는 싱그러운 농촌 풍경이 아름답다.

 

195210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동안 대 혈전이 계속되었고 포탄 30만발이 작렬하면서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다. 포격으로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해서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이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 산화한 육군 제9사단 장병들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철원군 동송읍에 백마고지 전투전적비를 건립하였다. 백마기념관에는 당시 전투에서 사용한 바주카포, 탄약, 탄창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니까 19506.25 한국전쟁이 발발했던해 내 나이 7살이었다. 그때 어린 나이인데도 피난 다니며 본 수도없이 많은 북한군과 중공군, 그리고 우리나라 국군들이 전사하여 길 거리에 즐비하게 널려있는것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이날 내가 아내와 친구 부부와, 세계전투 사상 가장 격전지로 알려진 백마고지를 보기 위하여 몇 해를 별러던 백마고지를 가고 있다. 그런데 이곳은 최전방 접적지역 인데도, 군인들이 근무하는 GOP 인근까지 우리 나라 5대 평야인 철원 평야가 넓게 펼처저 있고, 이곳을 농민들이 출입영농을 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감회가 새롭다

 

나는 백마 고지에 도착 할때 까지도 백마고지가 어느 정도는 고도가 있는줄 알았다. 그래서 등산화에 배낭까지 챙겼다. 그런데 현장에 도착하고 보니, 백마고지는 산이 아니라 기념비와 기념관이 있을뿐이다.

 

그러니까 알기쉽게 이야기 하면 백마고지는 사현재 우리군이 주둔하고 있는 DMZ내에 있고, 이곳은 백마고지 전적비와 탑은 백마고지 전투의 심각성을 국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하여, 저멀리 백마고지 전투 현장이 보이는 현재의 장소에 안보 견학용 차원에서 마련된 장소이다.

 

그런줄도 모르고 나는 산행을 하겠다고 산행준비를 하고 나섰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런 부끄럼은 사실 나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던, 지금 나는 백마고지 전투의 심각성에 대하여 늦게나마 제대로 깨우치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탐방길인 모른다.

 

과거에는 이곳 백마고지를 오려면 사전 군 부대 동의를 얻는, 번거로운 절차를 따라야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 나의 탐방길에는 그런 불편없이 누구나 찾아와 6.25한국전쟁의 참상을 돌아볼 수 있다. 진즉 이런줄 알았으면 네살 손자 도영이도 동반하고 올것을 ...

 

이곳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 1개사단이 사망하고, 우리나라 국군 9사단 병력 3428명이 희생을 하면서, 하루 24번이나 서로 뺏고 빼앗기는 눈물겨운 전투끝에 이곳을 우리나라 국군의 수중에 넣게 되었다고 한다. 전몰 장병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새기는 동안 나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이 흐른다.

 

백마고지 전적지는 순국 선열을 위해 마련된 여러 기념 시설들이 조성되어있다. 당시 전투에서 아까운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한 위령비와 돌무덤이 있는데, 위령비에는 전사자 아군 634, 중공군 8,234명의 영혼을 진혼케 하였고, ‘백마의 얼이란 시문이 새겨져 있다. 돌무덤에는 아군사상자 수와 동일한 운모가 섞인 평석 3,482개가 쌓여 있다.

 

,서관으로 구분된 총 면적 50, 전시면적 35평 규모의 기념관도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백마고지 전투상황과 전리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2.5m의 전적기념비는 각각의 숫자를 합한 9가 당시 전공을 세운 9사단을 의미하며, 전적비 상단의 비마(飛馬) 3마리는 3개 연대를 나타낸다. 기념비 뒷면의 동부조는 9사단의 영원한 승리와 환희 자유를 갈구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유의 종과 종각에는 전 총무원장인 석주스님의 글씨가 쓰여져 있다. 종은 500, 1.8톤 무게로 경주 봉덕사 에밀레종을 기본 모형으로 했다. 자유의 종은 적북방향인 북한 고암산 방향으로 배치되어 꼬리로 종을 쳐 북녘 땅까지 울려 퍼지게 하여 통일을 성취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6.25전쟁 당시 최대 격전지의 하나로 10일간(1952.10.615)의 밤낮없는 전투로 그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던 백마고지, 이는 한국군의 용맹성을 상징하고 있다. 중서부 전선 395고지였던 이곳은 혈전사투의 초연이 걷힌 뒤 처절하게 변모한 산용이 흡사 백마의 위상과 비슷하다 하여 백마고지라 불려지게 되었다.

 

전상자 3,428명 전사자 634명에 이르렀던 처절한 전투에서 사단장 김종호 소장은 적 사살 8,234, 부상 6,098, 포로 3,422명이라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백마고지의 3군신(강승우 소위, 오귀봉, 안영권 하사)의 무훈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국평화의 위대한 영혼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록 전쟁이 끝나고 난후 였지만 35년전 김신조가 우리나라 청아대 습격을 감행하였을 당시에 현역 생활을 하였던 나의 입장에서는 비오듯 쏟아져 내린 총탄의 흔적으로 철모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뚫어져 전시된 실물 모습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려, 잠시 눈을 감고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다.

 

백마고지 견학을 마치고 두 가족은 다시, 철의 삼각지 였던 김화와 철원 사창리까지 안보견학을 위하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때다. 어디쯤인가. 앞만 보고 운전하며 가는데, 김화지역(이번 방책선 철책이 뚫린지역) 인근에 다가오니 도로를 군인들이 철저히 바리케이트를 치고, 통행인들의 출입을 증명을 확인을 하고나서 통행을 시킨다.

 

김화의 동숭과 와수리를 지나 철원으로 향하다 보니, 잠곡 땜이라는데 땜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물속으로 푸른 하늘이 그대로 반영에 비친다. 심지어 물 고기들이 한가롭게 먹이를 찾는 모습이 거울처럼 생생하게 보인다.

 

아마 내 평생 이렇게 맑고 깨끗한 댐은 처음 본것 같다. 우리는 바쁘게 달려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청정땜(잠곡땜)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시간가는줄 모르고 감상에 젖어든다.

 

 

아직은 널리 알려져 있지않아,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이렇게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가 쉽지가 않을것이다. 특히 인근에 조성되고있는 복주산 휴양림은 전쟁후 50년간 통제가 되던 곳을 개방하여 휴양림으로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이곳의 오염되지 않은 청정 휴양림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몰이를 할것이란 생각을 하며 조금더 머물고 싶은 아쉬움을 뒤로 하며 다음 이동지 철원을 향해 달려간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이어지는 청정지역의 가을산 모습에 눈이 홀린듯 하지만, 나는 운전 때문에 그림의 떡이다. 하지만 모처럼 내가 운전해 드라이브를 즐기는 수고로, 친구 부인과 나의 아내가 마냥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강원도라 굽이굽이 곡선으로 돌아가는 묘기 만점의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는 기분이 최고다. 모두를 다 만족할 수 없지만, 붉게 노오랗게 단풍으로 물들여진 아름다운 풍경을 스쳐 지나는 왕복 일차선을 달리는 기분이 경쾌하다.

 

그 바람에 왕년에 내가 좋아했던 올드팝 볼륨을 올리니, 일행들 하나같이 센치멘탈 감정에 젖어든다.

 

 

 

얼마를 달렸을까. 산정호수를 지나는데 친구가 말한다. 포천 광덕산 인근에 있는 이동갈비 촌으로 진로를 수정하라고, 그리고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가잔다.

 

그러면서 지난번 내가 회갑기념으로 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바람에, 가장 친한 친구에게 회갑주 한잔 따르지 못하여 미안하다며,소주를 한 잔 따라 주지만 운전 때문에 흉내만 내고 생갈비와 맛좋은 냉면으로 배를 채운다.

 

그런데 친구 이때 친구가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심각한 어조로 나에게 말한다. 앞으로 3년 정도만 더 도회지 생활을 하다 자신의 목장 인근으로 내려와, 함께 노년을 서로 이웃해 의지하며 살자고...

 

그러면서 모든 기반 준비는 자신이 알어서 할테니 나더러는 따르기만 하라고 한다. 비육우를 하면 큰 기술 투자금 많이 안들고 할 수 있으니 마음에 결정만 하라는 예기다. 갑작스런 친구의 말에 감사를 한다. 하지만 당장 그자리에서 친구의 제안에 승낙을 미루고 음식점을 나선다.

 

이동갈비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정면 전방에 보이는 산이 국망봉인데 그 산에 산불이나 타고 있는 현장이 보인다. 아마 모르긴 해도 어느 몰지각한 등산객이 버린 담배꽁초나, 취사행위로 인한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불타고 있는 국망봉 울창한 산림 정도로 조림이 조성되려면 빠르다해도 30~50여년은 걸려야 한다. 나도 산을 사랑해 산행을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산에서 휴지 한장, 버리지 않았으며, 장거리 산행중이라도 지정된 장소가 아니면 절대 취사 행위를 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산행을 하다 보면 아직도 몰지각한 산꾼들이 말로는 건강을 위해, 산행을 한다고 하면서도 산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취사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왕왕 볼 수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같은 산꾼으로 부끄럽고 챙피하다. 마음 같아선 이런 사람들은 절대 산에 올 수 없게 하는 법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국망봉 화재 현장을 목격을 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찝찝하다. 때문에 우리는 이쯤에서 이어지는 드라이브를 포기하고 다시 친구의 농장으로 서둘러 귀가를 한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서둘러 귀가 준비를 한다.

 

그러자 친구 부부가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또 바리바리 먹거리를 챙겨 주신다. 김치, 각종 반찬류 배추 무 20여폭을 차에 바리바리 싫고 친구의 농장을 나서는 시간이 오후 4시다.

 

이날따라 지체되는 교통 체증으로 무려 3시간여 만에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며 이날 운행 기록을 보니 무려 410km를 운행했다. 그럭저럭 9시간 운전을 했더니 나에겐 열댓시간 산행 한것 보다 더 피곤한것 같다.

 

하지만 모처럼 아내를 위하여 봉사했다 생각하니 나름 기분이 좋다. 가벼운 마음으로 현관문을 들어서니 올해 4살 손자아이 도영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앉기며 보고 싶었다고 화사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의 피로가 언제 그랬어냐는듯 가셔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