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9. 29. 07:37ㆍ☎파평윤씨네사랑방☎
윤관(尹瓘) 동현(同玄), 문경(文敬), 문숙(文肅)
시대 : 고려
출생 : 미상
사망 : 1111년(예종 6)
유형 : 인물
직업 : 문신
성별 : 남
분야 : 역사/고려시대사
본관 : 파평(坡平, 지금의 경기도 파주)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동현(同玄). 고려태조(太祖)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윤신달(尹莘達)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윤집형(尹執衡)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종(文宗) 때 과거에 급제하여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냈다. 1087년(선종4)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숙종 1)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형부시랑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肅宗)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상서에 따라 직에서 물러났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進士試)를 주관했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1103년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윤관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숙종 9) 2월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여진정벌의 임무를 맡을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이었다.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부족장 영가(盈歌)의 지휘아래 차츰 성장해 나갔고 1103년(숙종 8) 우야소(烏雅束)가 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미쳤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까지 쳐들어오게 되었다.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임간(林幹)에게 평정하도록 했으나 오히려 여진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 윤관이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1104년(숙종 9)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으면서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다. 그러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어쩔 수 없이 임기응변으로 화친을 맺고 일단 철수하였다.
여진의 기병을 고려의 보병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였다. 이에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장(邊將)의 보고를 접하자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로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 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이 400여 명을 보내왔다. 이때 이들을 유인해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 3,000천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양유송(梁惟竦) 등 2,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 함경남도 정평군과 함주군에 걸쳐 있는 호수. 광포호 혹은 도련포라 불린다)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 이를 격파하였다.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공격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여진의 전략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 처이고 전사자 4,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해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과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嶮鎭)에 이주민 532가구였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았다. 이렇게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자 그곳에 웅거하던 우야소가 반발해 1108년(예종 3) 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고려군은 가한촌(加漢村) 전투에서 포위당했으나 척준경 등의 활약으로 겨우 구출되었다.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도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또 여진군 수만 명에게 웅주성이 포위되었을 때에도 척준경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해 개경으로 개선하니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해졌다. 그러나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이었기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은 매우 절실한 일이었고 더욱이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로 말미암아 그들의 농경지를 빼앗겼으니 토착여진족들로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영원히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성을 돌려주기를 청하였다. 여진은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을 개시했으며 이에 예종(睿宗)은 육부(六部)를 소집하여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한상(韓相)은 반대했으나 고려조정의 대세는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쪽 통로만 막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러한 예측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고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도 화평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그리고 9성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할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있었다.
결국 1109년(예종 4)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해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했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된 것이다. 그렇지만 매우 역설적인 것은 훗날 아쿠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이때 찾은 9성이 그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9성의 환부로 여진 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 조차 삭탈 당하였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년(인종 8)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사적 제323호)에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1130년(인종 8) 수릉(綏陵)의 휘(諱)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별무반
여진 정벌을 위해 기병을 중심으로 윤관이 조직한 군대.
만주에서 주로 유목생활을 하던 여진족(이전의 말갈족) 가운데 일부는 고려 천리장성 이북인 동북면(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들어와 농경이나 어업에 종사하며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처음에 고려에 조공을 바치면서 필요한 물품을 가져갔는데, 점차 고려의 백성으로 편제되기를 희망하였다. 특히 거란 침입 때는 고려의 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문종 때 고려의 주(州)로 편입시켜 주기를 요청하는 여진인이 급증하자, 고려 조정은 여진 추장에게 관작을 주어 고려의 번병 역할을 하는 기미주(羈糜州)·귀순주(歸順州)로 삼아 정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여진 부락 간에 내분이 일어나 완안부(完顔部)가 남하하면서, 여진족은 동북면 지역을 잠식하고 변경에 머물러 고려의 위협이 되었다.
이에 고려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길주(吉州) 북쪽 병목〔甁項〕지역에 요새를 설치할 목적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하였다. 여진정벌은 고려 태조 때부터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여야 할 옛 영토로 인식하고 꾸준히 추진한 북진정책의 결과이다. 하지만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면서 문벌귀족간의 분열이 일어났고, 이 지역을 장악한 완안부 세력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만주와중원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부모의 나라로 섬기던 고려에게 사대(事大)를 요구하였다.
고려시대 최초의 대규모 여진정벌은 1080년(문종34) 12월 여진족의 소요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이 때 문정(文正)이 3만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10여 부락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1104년(숙종 9)까지 여진족은 소요을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흑수(黑水) 일대에 있던 완안부 세력이 남하하여 가란전〔曷懶甸〕지역의 여진 부락을 통합하고, 1102∼1103년에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1104년에 완안부가 그들에게 항거하는 7성(城)의 부족을 추격하면서 정주(定州)에 이르자, 고려는 이를 공격하였다. 이 때 임간(林幹)은 여진과의 첫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이어 윤관(尹瓘)이 나아가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하여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여진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것은 숙종과 윤관에게 큰 치욕으로 남았고, 정국운영에도 큰 차질을 초래하였다.
윤관은 패배의 원인이 기병(騎兵)의 열세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고, 국왕에게 건의하여 신기군(神騎軍)·신보군(神步軍)·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된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여 정예 군사를 양성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일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은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을 출발하여 여진정벌에 나섰다.
그 결과 ‘그 지방이 300리로,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북쪽은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남쪽은 장주(長州)·정주(定州)에 접한다’는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복주(福州)·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숭녕진(崇寧鎭)·진양진(眞陽鎭) 등 9성을 쌓고 남쪽의 민호를 옮겨 살게 하면서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그러나 주변 지역이 매우 넓은 데다가, 완안부 세력이 산 속에 거주하면서 집요하게 약탈하며 9성의 반환을 애걸하였고, 여진과 오랫동안 대치하면서 국력이 소모되었으며, 향후 거란과도 다툴 수 있다는 여론에 따라, 고려는 1년 7개월만에 이주한 백성을 본거지도 되돌려보내고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윤관의 별무반과 강해진 여진족 귀주 대첩 승리 후 100여 년이 흘렀다. 그러나 고려와 거란 사이에는 작은 사건 들이 몇 차례 일어나기도 했으나, 충돌은 없었다. 항상 여진족이 문제를 일으켰다. .
▶ 여진족 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렸어요. 당나라 때는 말갈인, 송나라와 명나라 때는 여진족, 청나라 때는 만주족 이라고 불렸지요.
* 여진족 은 압록강 부근에 흩어져 살면서 해마다 고려에 * 조공 을 바쳐 왔어요. 고려를 부모의 나라 로 섬기고 있었던 거예요. 고려는 이러한 여진족을 하찮게 여기며 크게 경계하지 않았어요. 고려가 이렇게 마음놓고 있을 때 한 지도자가 나타나, 흩어져 살고 있는 여진족을 모아 힘을 길렀어요. 그리고 고려를 공격 해 왔어요. 계속된 여진족의 침략에 숙종은 임간에게 여진 정벌을 명했어요.
‘여진족 놈들이야 눈 감고도 물리칠 수 있지요.’ 그러나 여진족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았어요. 여진족은 말을 탄 기병 이었어요. 그런데 고려 군사들은 보병 이어서 쉽게 이길 수 없었어요.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도망쳤어요. 여진족에게 임간이 크게 패하고 정주성까지 빼앗겼다 는 소식에 조정은 발칵 뒤집혔어요.
▶윤관은 지배 계층인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어요. 젊어서부터 고려 국경을 벗어나 백두산에 올라 고구려의 영토를 되살릴 꿈 을 키워 나갔지요. 숙종은 국경을 지키고 있던 윤관에게 여진족을
* 섬멸 하라는 명을 내렸어요. 그러나 윤관 또한 크게 패했어요. 윤관은 적을 모르고 싸워 군사를 희생시킨 것을 후회했어요. 윤관은 어쩔 수 없이 여진과 평화조약 을 맺고 돌아왔어요. 윤관은 개경으로 돌아와 숙종에게 보고했어요.
“여진이 또 언제 우리 국경을 넘볼지 모릅니다. 적은 대부분 기병이니 앞으로 여진을 무찌르기 위해서는 우리도 한시바삐 기병을 길러 내야 합니다.” 숙종은 당분간 여진족과 평화롭게 지내면서 그동안 군대를 재편성하고 훈련시키라고 명했어요. 이렇게 하여 윤관은 새로운 군대를 조직 했어요. 이 특별 군대의 이름을 ‘별무반’이라고 했어요.
별무반은 기병, 보병, * 승병 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말을 잘 타는 젊은이들을 기병 으로 뽑아 ‘신기군’이라 하였고, 20세가 넘은 젊은이들을 보병 으로 뽑아 ‘신보군’이라 했어요. 그리고 절에 있는 젊은 승려들 을 뽑아 ‘항마군’을 만들었어요. 별무반이 조직되자 곧 군사 훈련을 시작했어요. 또 한편으로는 군량미와 무기도 갖추고 대규모의 여진 정벌 계획 을 빈틈없이 짜 나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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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로 세운 동북 구성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인 1107년, 마침내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여진족을 무찌를 군대를 일으켰어요. 예종은 싸움터로 나가는 군대를 따라 서경(평양)까지 가서 총사령관인 윤관에게 부월이란 본디 큰 도끼와 작은 도끼를 뜻하는 말로, 임금이 내리는 부월은 금빛이었어요. 싸움에 나가는 우두머리 장수에게 군사를 통솔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권한의 상징으로 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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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를 물리쳐서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필코 승리할 것이옵니다.” 여진족을 치기 위해 그 동안 훈련을 쌓아 온 고려군은 기세 당당하게 행군했어요. 또한 수군에게는 동해의 앞바다에서부터 *진격해 들어가라고 명했어요. 여진족은 고려군의 어마어마한 수륙 양면 작전에 미리 겁을 집어먹고 모조리 도망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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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은 정찰병을 보내 여진족이 숨어 있는 곳을 찾게 하고, 바로 고려군을 출동시켜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어요. 그러자 여진족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지요. 윤관은 고려군의 희생이 늘자 후퇴하고 공격 작전을 바꾸었어요. 깊은 밤에 고려군 몇 사람을 성으로 보내 여진족 추장을 죽이고 성문을 열게했던 거예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여진족은 당황하여 갈팡질팡했어요. 이 틈을 이용해 고려군은 성난 파도처럼 성 안으로 들어가 여진족을 모두 무찔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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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을 무찌른 윤관은 여진족이 살던 지방에 튼튼한 성을 쌓았어요. 이 때 쌓은 성은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 숭녕진, 통태진, 진양진모두 아홉 군데였어요. 그래서 9성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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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남자는 언제 군대에 갔나? 고려 시대에는 남자라면 누구든지 군대에 가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어요. 16세 때부터 60세까지 군생활을 해야 했지요. 그러나 44년 내내 군대에 가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1년 동안 개경이나 국경 지역에서 군대 생활을 한 다음에는 2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었지요. 즉 3년마다 한 번씩 교대로 군생활을 했던 거예요. 물론 군대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농민들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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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은 계속 고려 국경을 침범하면서 9성을 돌려달라고 했어요. 여진족은 9성만 돌려주면 다시 부모의 나라로 섬기겠다고 했어요.그러자 고려 조정에서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9성을 지키기가 어렵고 9성을 돌려주면 여진족이 다시 부모의 나라로 모신다고 하니까 신하들이 찬성한 거예요. 결국 예종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9성에서 고려군을 모두 철수시켰어요. 예종 4년,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시작된 지 1년 7개월 만에 9성은 다시 여진족에게 되돌아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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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 9성 : 윤관이 여진족을 몰아내고 쌓은 9성을 동북 9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후 여진은 금나라를 세워 만주 일대와 송나라 땅까지 빼앗아 나라를 크게 키웠어요. 힘이 세진 금나라는 더 이상 고려를 섬기지 않았어요. 오히려 동생의 나라라고 여겼어요. 고려는 금나라가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금나라의 왕은 고려와 전쟁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려와 금나라는 전쟁을 벌이지 않고 서로 경계를 하며 평화 상태를 유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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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 1115년에 여진족 추장 아구타가 지금의 만주, 몽고, 화북 땅에 북송과 요를 무찌르고 세운 나라예요. 1234년 몽골 제국에게 망하게 되지요.
*조공(조정 朝, 바칠 貢) : 옛날에, 힘이 약한 나라가 크고 힘이 센 나라에 예물을 바치던 일 *보병(步兵) : 걸어서 이동하며 싸우는, 육군에 속한 군인
*섬멸(멸할 殲, 멸망할 滅) : 적을 모조리 무찔러 없앰
*승병(僧兵) : 스님들로 조직된 군대
*도원수(都元帥) : 고려, 조선 시대에 전쟁이 났을 때 군사를 총괄하던 임시 무관 벼슬
*진격(進擊) : 적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감
*만반(일만 萬, 일반 般) : 마련할 수 있는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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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과 예종, 여진을 정벌하다
여진족의 뿌리는 말갈족이다. 말갈족은 고려 초기부터 빈번히 변방을 습격했다. 그들은 일정한 근거지 없이 산악지대나 늪가에 살면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일찍이 고려에서 북방에 장성을 쌓은 것이나 동해안의 요해지에 성을 쌓은 것은 이들 여진의 침략 행위와도 관계가 많았다. 특히 문종은 문종 34년(1080)에 3만여 병력을 동원하여 동북 여진을 정벌, 북방의 여진족을 잠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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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후 완안부라는 여진족의 신흥 세력이 등장하면서 고려와 여진과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완안부 추장, 즉 금 태조 아구타의 세계에 관해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평주 지역의 승려 금준이란 자가 여진으로 도망쳐 아지고 촌에 살았다고 하는데, 금준의 본명은 김지선이라고도 하고 혹은 승려 김행지의 아들 김극수라고도 한다. 그가 처음 여진족 아지고 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를 얻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고을태사였다. 고을태사는 활라태사를 낳았고 활라태사는 아들을 많이 낳았는데 그중 큰아들이 핵리발이요, 둘째 아들이 영가였다. 영가는 매우 웅걸하여 세력을 얻었다. 그리고 영가가 죽자 그의 형 핵리발의 큰아들 우야소가 뒤를 이어 추장이 되었으며, 우야소가 죽자 그의 아우 아구타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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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금나라 황실 시조 및 완안부의 추장이 고려 출신이라는 것인데 금 황실의 고려출자설은 당시 널리 회자될 정도였다. 여진족은 고려출자설을 바탕으로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하곤 했다. 완안부는 추장 영가 때에 이르러 주위의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고 지금의 간도 지방을 복속하는 한편, 갈라전 지역까지 남하하는 등 급격히 세력을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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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전은 고려 북방의 장성과 바로 인접한 곳으로 완안부의 남하는 앞으로 고려와의 충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여진족을 발흥시킨 영가는 후대 목종으로 추존된 인물로서 그가 핵리발의 뒤를 이어 추장이 된 것은 헌종 즉위년(1094)이었다. 영가가 완안부를 이끌고 있던 시절에는 고려에 대해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과 고려의 관계는 매우 원만한 편이었다. 1103년 영가가 죽고 그의 조카 우야소가 뒤를 이으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야소가 완안부의 새 추장이 되자 부내로를 비롯한 반대파들이 반기를 드는 등 동여진 내부에 또다시 분열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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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야소는 부내로를 공격하기 위해 정주 지역에 진을 치게 되었고, 마침 갈라전 지역을 두고 여진족과 신경전을 벌이던 고려는 여진족의 움직임을 침공으로 의심하였다. 당시 고려 왕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정주로 보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했다.1105년 2월 공명심에 들뜬 임간이 군사를 이끌고 너무 멀리 쳐들어가는 오판을 자초하는 바람에 여진과의
첫 전투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 일로 임간은 파직되고 그 후임으로 추밀원사 윤관(尹瓘)이 발탁됨으로써 이른바 윤관의 ‘여진 정벌’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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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총동원부대 ‘별무반’의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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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년 3월, 임간의 뒤를 이어 출정한 윤관은 적 3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으나 오히려 고려군의 피해가 더 심해 쓰라린 첫 패배를 맛보야만 했다. 윤관의 패배는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보병이 주축이 된 군사력만으로 기마부대인 여진군을 따라잡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한 일이었다. 싸워봐야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윤관은 일단 여진군에게 백기를 들고 절치부심 후일을 기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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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간에 이어 믿었던 윤관마저 패하고 돌아오자 숙종은 분한 마음에 천지신명께 서약까지 하며 여진 정벌을 천명했다. 하지만 여진족 기마병의 위력을 직접 경험했던 윤관의 생각은 달랐다.
“신이 패한 까닭은 적들은 말을 탔고 우리는 걸으면서 싸워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별무반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기마병으로 구성된 신기군을 중심으로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그리고 특수병인 도탕군, 경궁군, 정노군, 발화군과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된 별무반은 나이 스물 이상의 모든 백성이 입대해야 하는 의무군이었다. 문무양반은 물론이고 아전, 농민, 장사치, 노비, 승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징발 대상이었으니 별무반은 그야말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총동원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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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반은 여진을 다시 정벌하려는 야심찬 계획의 하나로 진행되었으나 그 이듬해 숙종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여진 정벌의 과제는 그의 아들 예종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예종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중신들은 선왕의 유지를 받들어 여진을 토벌할 것을 상소했다. 예종은 출병할 것을 결심하고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했다. 윤관이 임금에게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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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일찍이 선왕의 밀지를 받았사옵고, 이제 전하의 엄명을 받았사옵니다. 감히 3군을 통솔하고 적의 보루를 격파하여 우리 강토를 개척하고 지난날의 국치를 씻겠사옵니다.”“충성스러운 말이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예종이 기뻐했다. 그러나 부원수 오연총은 윤관의 태도가 못마땅하여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뭘 믿고 그리도 자신하는 게요?” “장군이나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죽음의 땅으로 가서 국가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소? 무엇을 의심하는 게요?” 오연총은 끽소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예종은 서경에까지 나가 위봉루에 올라 윤관에게 부월을 하사하고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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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년 11월, 윤관과 오연총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동부 변방으로 진군한 후 일단 군대를 장춘역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병마판관 최홍정과 황군상을 각각 정주와 장주에 파견하여 여진 추장을 꼬이도록 했다. 과거 숙종 때 포로로 잡힌 여진 추장 허장과 라불을 석방하려고 하니 직접 와서 이들을 데려가라는 것이 그 명목이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여진 추장 고라와 그 일행 4백여 명이 도착하자 윤관은 이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고려군의 환대에 그만 경계심을 풀어버린 여진군은 밤새 술을 마시며 추장의 석방을 축하하다 윤관의 기습공격에 그만 섬멸되고 말았다.고라를 비롯한 여진 지휘군이 일거에 섬멸되자 윤관은 20만 대군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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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이 이끄는 5만 3천의 군대가 정주 대화문을 나서는 것을 신호로 중군병마사 김한충이 이끄는 3만 6천 7백의 병력이 안륙수로 향하였으며 나머지 10만 병력도 각각 정주와 선적진, 도린포 등지로 떠났다. 정주를 출발한 지 반나절, 윤관이 이끄는 5만 부대가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내파지 촌이었다. 이곳에 있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이 새까맣게 몰려오자 겁에 질려 모두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손쉽게 대내파지 촌을 함락해 버린 윤관은 거기서 더
전진하여 문내니 촌으로 갔다. 이 지역의 여진군은 동음성에 진을 치고 고려군에 저항하며 쉽게 성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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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은 임언과 최홍정에게 정예부대를 내주어 이들을 모두 몰아내게 했다. 어렵사리 동음성을 함락한 윤관은 군사를 이끌고 그 다음 제물 대상인 석성(石城)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여진군이 일대 항전을 준비하며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석성 지역에서 여진군과 맞닥트린 윤관은 먼저 이들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하지만 여진군은 굴복하지 않고 석성으로 들어가 화살과 돌을 마구 퍼부으며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이에 질세라 고려군도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지만, 여진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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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자 윤관은 용감하기로 이름난 장수 척준경을 불렀다. “날이 저물면 상황이 더 위급하게 될 것이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과 함께 적을 공격해 주기 바라네.” “이번이야말로 지난날의 과오를 씻을 절호의 기회이니 이 한 몸 희생하여 은혜에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윤관의 특명을 받은 척준경이 흔쾌히 승낙했다. 척준경은 일전에 임간을 따라 여진 토벌에 참여하였는데 그만 실패하여 파직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윤관의 도움으로 간신히 복직이 되어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이었다. 명예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라 여긴 척준경은 방패를 들이밀며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뚫고 적진으로 몸을 던졌다. 마침내 적진으로 들어간 척준경이 적장 여러 명을 쳐 죽이는 맹위를 떨치자 덩달아 기세가 오른 고려군은 여진군을 일시에 궤멸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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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은 포로 수가 무려 5천을 넘었고 목이 잘린 자도 5천이 넘었을 정도로 윤관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고려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고사한을 비롯한 1백여 개의 여진 촌락은 모두 쑥대밭이 되었고 남녀노소를 비롯한 일반인 사상자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바위에 몸을 내던져 자결한 자들도 많았으며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이 길에서 서로 맞부딪쳐 죽을 정도로 여진족은 참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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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 9성의 축조 여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윤관은 제일 먼저 예종에게 승전보를 알렸다. 승전 소식을 접한 예종은 기뻐하며 좌부승지 심후와 내시형부원외랑 한교여를 전선으로 파견, 윤관과 그 부하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조서를 보냈다. 여진족 1백여 개 촌락을 평정한 윤관은 부하 장수들을 그곳으로 보내어 동북계의 국경선을 획정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당시 획정된 국경선의 범위는 동으로 화곶령까지, 북으로 궁한이령까지, 서로는 몽라골령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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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선이 획정되자 윤관은 성곽 건설에 전념하여 몽라골령에 950간에 달하는 성곽을 쌓고 영주성이라 불렀으며 화곶령에는 992간을 짓고 웅주성이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오림금 촌에는 774간을 지어 복주성이라 이름하고 궁한이 촌에는 670간을 지어 길주성이라고 하였다. 더욱이 영주성 안에는 호국인왕사와 진동보제사라는 두 개의 절을 세웠고 또한 이 지역에 고려 주민 수천 호를 이주시켜 살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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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관의 대활약에 힘입어 고려는 영주, 복주, 웅주, 길주 4주와 함주, 공험진을 합친 6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다. 윤관은 6성에 만족하지 않고 같은 해 예종 3년(1108) 3월, 의주와 통태, 평융 세 곳에 더 성을 쌓아서 마침내 9성의 축조를 완성시켰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윤관의 동북 9성이다. 당시 축조된 9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많다. 《고려사》는 영주와 웅주는 길주 근방이고, 복주는 뒤의 단주(단천), 공험진은 백두산 동북쪽의 소하강가에 있었다고 하는데 후대 일본 학자들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잡아서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 일대라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험진을 경원의 아오지보라고 보는 이른바 두만강 이북설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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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의 위치가 어찌되었건 간에 당시 9성 3백리 땅이 여진과 고려 사이에 분쟁의 씨앗이 된 이유는 그 지역이 과거 고구려 영토였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고려는 이 지역을 수복하고 싶어 했고 아울러 완안부의 남하를 경계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반면 동여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이미 몇 백 년째 그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영유권을 주장하려 했다. 동북 9성의 설치 이후에도 여진이 끊임없이 이 지역의 수복을 위해 맹렬한 반격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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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의 반격과 척준경의 대활약
의 9성 축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1월에 윤관과 오연총이 정예군사 8천을 이끌고 길이 좁은 가한촌 병항소로라는 지역을 지나가다 여진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는데, 이때 고려군은 거의 죽거나 흩어져 달아나고 겨우 10여 명만 고립되어 적과 대항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연총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고 윤관은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들은 척준경이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용사 10여 명과 함께 적진으로 돌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때 그의 아우 낭장 척준신이 만류하며 길을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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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이 견고하여 돌파는 불가능합니다. 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제발 가지 마십시오.” 하지만 척준경은 “늙은 아버지를 부탁한다.”는 말만을 남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윤관과 합세한 척준경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사이, 때마침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병을 이끌고 진군해 들어왔다. 구원병이 도착하자 여진군은 흩어져 달아나고 윤관과 오연총, 척준경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영주성에 돌아올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영주성에 돌아온 윤관은 척준경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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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나는 너를 친자식처럼 여길 것이니 너도 나를 아비와 같이 생각하거라.” 이 사건이 있은 직후 여진 추장 아로환 등 403명과 주민 1천여 명이 항복하였다. 이들은 윤관이 평정한
지역에 살던 자들로 추운 겨울에 옮겨 갈 곳이 마땅하지 않고 또 싸울 힘도 없으므로 자진 항복한 것이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월 하순이 되자 2만에 달하는 여진 군대가 갑작스럽게 영주성 남쪽에 진을 치고 싸움을 걸어왔다. 수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한 윤관은 적을 상대하지 않고 그냥 수비에만 전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척준경이 반대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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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금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병은 날로 많아질 것이오. 그때 가서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작정이오. 내가 전날에 싸워 이기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으니 오늘도 나가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겠소. 여러분은 성 위에 올라가 구경이나 하시오.”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결사대와 함께 성 밖으로 나간 척준경은 여진 선봉대와 혈투를 벌인 끝에 19명의 목을 베는 용맹을 발휘했다. 척준경의 활약에 사기가 떨어진 여진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고 당당히 개선한 척준경은 윤관의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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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에도 여진군의 반격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이듬해 예종 4년(1109) 여진군은 마침내 화친을 청해 왔다. 고려와 계속 싸워 봤자 도저히 승산이 없는데다가 그 와중에 북쪽의 거란(요)으로부터 어떤 화를 입을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여진은 화친의 조건으로 9성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저 9성만 반환해 준다면 종전처럼 고려를 상국으로 받들겠노라고 간청하고 나왔다. 하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이 지역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왔던 고려는 이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고려의 화친 거부로 9성 일대는 또 한 번의 싸움을 하게 되었고, 이때 출동한 윤관과 오연총은 그만 여진군에 패하여 돌아왔다.
9성의 반환과 윤관의 불명예 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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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 지역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자 예종은 1109년 6월 23일 신료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9성의 반환 여부를 논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날의 강경론과 달리 화친하자는 쪽으로 중론이 모아졌다. 9성의 반환에 찬성한 주화파는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이나 된 데 반해, 반대한 주전파는 예부낭중 박승중 등 2명에 불과했다. 결국 이 날의 회의는 종전과 같은 군신관계를 회복하고 9성의 땅을 반환해 주는 것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거듭되는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것은 고려도 여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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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7월 2일 9성의 반환을 여진 측에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마침 고려에 와 있던 여진의 사신 요불과 사현이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쏟아내었다고 하니, 이 지역에 대한 여진인의 마음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 고려에서는 9성 지역만 차지하고 나면 북방의 적들을 쉽사리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9성은 결과적으로 끊임없는 전쟁의 화근만 될 뿐이었다. 게다가 이주해 온 백성들마저 온갖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을 겪게 되자 고려에서도 더 이상 9성 지역에 미련을 두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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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성이 반환되는 것으로 결론이 나자 그동안 여진 정벌을 탐탁지 않게 여긴 중신들이 여진 정벌의 과오를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다. 평장사 최홍사를 비롯한 정벌 반대파들은 윤관과 오연총을 겨냥, “무리한 정벌을 일삼아 국력을 소모하게 했다.”며 연일 직격탄을 쏘아댔다. 하지만 이들이 정작 겨냥한 것은 여진 정벌의 공을 세운 윤관 세력이 조정에 돌아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문책론에 밀린 예종은 윤관의 원수직을 거두는 것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이 때문에 개경에 돌아온 윤관과 오연총은 왕에게 보고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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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의 수습에도 불구하고 문책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고 조정 대신들은 계속해서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두 원수는 나의 명을 받들어 군사를 움직였을 뿐이 아닌가. 싸움에 나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것이 상례이거늘 어찌 이들에게 죄를 묻겠는가.” 예종의 두둔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은 파업까지 단행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최홍사, 임의 등이 주축이 된 탄핵론은 수십 일을 끌다가 윤관과 오연총을 면직하고 공신호마저 삭탈하는 극약 처방으로 간신히 수습되었다.
여진 정벌의 맹장 윤관은 ‘무모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시킨 자’라는 억울한 누명을 입고 불명예 퇴진을 하였다. 하지만 그의 공적을 잊지 못한 예종의 배려로 이듬해 예종 5년(1110) 오연총과 함께 다시 복직되어 명예를 회복하는 듯했다. 이미 자존심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윤관은 복직 제의를 정중히 사양하였다. 예종은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직한 것이니 내 마음을 받아들여 하루빨리 관직에 나오라.”고 달래었지만 윤관은 끝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어떤 것으로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할 수 없었던 윤관은 이듬해 허무하게 세찬 풍진의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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