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도보여행 노량진 사육신공원 ~ 국립서울현충원까지

2017. 8. 28. 15:59☎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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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도보여행 노량진 사육신공원 ~ 국립서울현충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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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도보여행 (노량진 사육공원, 국립서울현충원 대통령 묘역) 참배

 

매월 마지막주 일요일은 늘 나와 함께 산행을 하는 산친구들과 산행을 하는 날이다. 그런데 이번 산행지는 어디로 갈까? 아니 그걸 내가 왜 신경을써 아랫것들이 있는데, 나 보다 두 서너살 아래인 조대장이 있는데...

 

조대장(조대흠)은 서울 S대 출신이다. 그러니 말안해도 모든부분 박식한 사람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것은 산에 관해서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다. 어느정도냐면 내 생전에 산꾼중에 조대장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못봤다.

 

그래서 난 아주 이따금씩 조대장에게 실없는 농담을 한다.

조대장 혹시 엄마 아부지가 조대장 산에서 만든거아냐?” 하고 놀리면,

아이 참 형님도 하며 부정도 인정도 안하는 사람이라니까요.”

 

그런데 이 조대장이 이번 일요산행은 뜻밖에 서울 노들역에서 시작하는 역사탐방 도보여행 코스로 서울시 동작구에 위치한 사육신묘”, “사육신역사공원”, “노들역 정조대왕능행차도8”, “배수지공원”, “고구동산”, “조망명소”,“동작충효길”, “서달산유아숲체험장”, “달마사”, “동작대”, “서달산179m(달마공원)”, “동작대”, “현충원순례길”, “국립서울현충원에 이르는 구간을 산행지로 결정했다고 연락이 온다.

 

그러다 보니 집을 나서는데 절로 콧래가 나온다. 오전 10시 노들역 1번출구에서 일행들을 만났다. 참석인원은 조대장(조대흠), 연산동(최윤영), 파랑새(박인선)그리고 나 청파(윤도균) 네명이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산이라고 보기엔 좀 그런 역사공원길탐방로를 들어선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원래는 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개(李塏)·성삼문(成三問)의 묘만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 공사를 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를 추봉(追封),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묘가 있는 곳은 지난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라는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 박팽년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했고, 유성원은 잡혀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 : 칼로 자결함)하였다. 또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軍器監)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했으므로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지내 줄만한 사람도 당시에는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는데, 나머지 사육신의 아들들은 모두 교형(絞刑)을 당했고, 남은 가족들도 노비가 되었다. 또, 먼 일가나 이웃들도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을 장사지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므로 이곳에 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과정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유씨지묘·이씨지묘·성씨지묘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 이 묘소를 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의 묘라고 전해왔다.


이렇게 민간에서만 인정되어오던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 5)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 군사 검열을 관람)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를 봉식(封植 ;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음)하였다. 1691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사장(露梁沙場)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하게 했으며, 곧 이어 사육신을 숭장(崇奬)하였다.


한편, 1681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1692년에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 손인 좌익찬 숭고(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의 존숭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782년(정조 6)에 이르러 육신묘비인 신도비(神道碑)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명은 태학사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로 설치된 민절서원은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서울시가 세운 6각(角)의 육신묘비가 있다.


비면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중·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또,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와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모두 1978년사육신 묘역의 정화 사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 다음백과사전 참조 -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2]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이리하여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되었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성삼문·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화성능행도병(華城陵行圖屛)"은 정조가 1795년  생부(生父) 사도세자와 生母 혜경궁홍씨(蕙慶宮洪씨)의 동년 회갑을 맞이하여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 .. 화성,융건능)이 있는 화성으로 혜경궁을 모시고 행차한뒤 성대한 잔치를 열면서 거행하였던 일련의 행사들을 8폭에 담은 기록화이다.  

 

조선시대 행사 기록화 중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으로 화려하고 장대하게 묘사한 작품으로써 정조의 지극한 효성과 원대한 정치적 꿈이 담겨 있으며, 아울러 정조시절의 난만한 회화 및 예술의 발달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걸작이다. 그림의 크기는 163.7cm x 53.2cm이다.



이 그림은 행사가 끝난 뒤 행사를 주관했던 정리소(整理所)에서 1796년에 완성하였으며, 이인문, 김득신, 최득현 등 많은 화원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행사가 끝난 뒤 정조가 정리소에 명하여 행사의 내용을 묘사한 도설(圖說)을 제작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머리에 첨가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도설작업은 윤2월8일 의궤청의 건의로 이해 1월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김홍도가 전관자(專管者)로 임명되어 그의 지휘아래 제작되었다. 따라서 儀軌의 圖說을 병풍에 맞게 변형시키고 확대하여 묘사한 정리소 발의의 이 계병은 김홍도가 관여했거나 그의 화풍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 그림은 김홍도 등의 집단제작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