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0. 20:15ㆍ☎파평윤씨네사랑방☎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尹(熙復)公 崇祖宣揚碑 除幕式
파평윤씨 대종회에서는 “문숙공윤관대원수(文肅公尹瓘大元帥)”의 묘역이 있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405번지 여충사에서 (2016년 11월 4일)경내에서는 여충사 묘제에 참석한 파평윤씨 후손 참배객 4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윤희복(尹熙復)公”에 대한 崇祖宣揚碑 除幕式이 거행되었다.
『고유문(축문)』
윤기 1124년 서기2016년 음력 10월 5일 후손 승혁은 첨지중추 부사공 영전에 고하나이다. 공께서 문숙공의 묘소를 되찾고 숭조하시기 위해 행하셨던 투지불굴 살신성인의 정신과 실천으로 오늘날 후손들은 문숙공의 묘소를 엄숙히 모시고 후손된 도리를 다 하고자 합니다.
공께서 그토록 염원하시고 숙원하시던 심총사가 400여 년 간의 각고 끝에 윤기 1116년 서기 2008년에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송구하게도 우금에야 공의 지대한 행적을 숭모하며 기리고 본받고 후손만대에 이를 선양하고자 이곳 여충사 경내에 공의 선양비를 모시고 제를 올리오니 강림하시와 흠향하시옵고 평안히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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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肅公 諱 瓘 尋墓事蹟
여지승람에 파주 분수원 북쪽에 윤모공의 묘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옛 족보에 파주 분수원 북쪽에 문숙공 묘소가 있으며 문강공 묘도 동원에 있다고 하였다. 공의 묘 앞에 교자총이 있고 청룡밖에 전마총이 있다고 씌여 있다. 그런데 이조에 내려와서 연산조때 양주, 파주, 고양등 세 고을이 왕이 사냥하는 유행소로 정해지고 일반 민간인의출입을 금하여 봉쇄지구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파가 한때 미약하여 수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화가 겹쳐서 후손들이 돌볼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정승 심지원이 그의 할아버지 묘를 써 놓고 그 후 이어서 수개의 묘를 썻지만 자손들이 선조의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數世를 지내왔다.
그후 영조23년 정묘(1747)에 후손 東圭가 그 아들 光魯와 함께 혼사로 장단땅에 가다가 마침 그 지역을 지나는 길에 분수원에 이르러 선조의 유영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산위에서 방황할 때 홀연히 본 즉 심지원묘의 청룡위에 다시 사초를 한 위아래 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두 짧은 비를 세웠으되 위에는 宣略將軍李好文墓라 씌여있고 아래는 執義德水李某墓라고 되어 있으며 심정승의 큰 무덤에는 전부터 비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몇 해 후에 다시 산위로 올라가 본즉 심정승묘 아래 큰 무덤이 있으되 분묘의 형상이 깎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있는데 본 즉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그곳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심정승의 묘 아래 큰 무덤인즉 윤시중의 묘이고 옛날에는 묘 앞에 돌사람과 비가 있었고 굽은 담장으로 된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가가 여기에 투장을 해놓은 후에 비석 같은 일체의 흔적을 없에 버렸으니 자손들이 찾으려야 찾을 도리가 없고 또한 구 후 백년을 그대로 내려 왔은즉 충분한 증거조차 없어 공의 묘소를 잃어버리고야 말 처지에 있어 자손들도 어떻게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할지 고심하던 처지에 있던 때였다. 이에 그 부자가 곧 산에서 내려와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여 유영을 찾을방도를 연구케 하였다. 우선 이호문의 손자 亨鎭을 붙잡아다가 힐문한 즉 심가가 이가를 매수하여 위의 이호문묘라를 것은 허광이요 아래편이 진광으로 심가의 변형 총으로써 공의 묘소 삼광을 덮쳐 침범한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 묘비를 없애 버려 흔적을 소멸시키려는 묘계로서 이호문의 후손들에게 제토를 주어 제사케 하였던 것이다.
교자총이라 함은 문속공께서 북정하실 때 타시던 교자를 이에 묻은 것을 말함이다. 후손 佐尹公 勉敎가 諸宗의 선두에서 왕께 이 연유로써 상소를 하였고 계속해서 左相公 東度께서 왕께 아뢰니 영조대왕께서도 그 간사한 형편을 살피시다 다만 확증될 만한 비문이 없고 또한 오랜 세월을 경과하였기 때문에 이가의 비를 빼어버리는 것만을 명하시고 양가에서 각기 수호하라는 명령이 계시 되었으니 자손 된 사람으로서 원통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 후 자손들의 정성으로 다행히 부러진 비석을 고총 좌편 열 발자국 밖에 작은 개천 속에서 발견 하였으니 이는 곧 그 근처 80세노인이 묻은곳을 가르쳐 준곳이다.
이 비석으로 공의 벼슬 성 시호가 완연하여 가히 분별하기에 어렵지 않았으니 제1행에 主國文敬 제2행에 大夫推忠佐理平 제3행에 肅公尹漫之墓 제4행에 一年三月日改라 하였으되 위 아래가 모두 분질러 진 것이다. 듣는 자로 하여금 어찌 신기하게 여기지 않으랴. 『윤만』은 공의 처음 諱인 것이다. 좌윤공이 다시 상소를 올리고 또 다시 문강공의 묘소를 찾고자 하였다. 왕도 또한 기이하게 여기사 이에 批答하여 가로되 하『늘의 밝고 밝음을 가히 알 수가 있고 경들의 지성으로 천년의 옛 비를 이미 얻었도다.』하시고 심정의 묘를 修塋하라는 하교를 내리지 않았다.
『후에 故相의 영이 있다면 그 뜻을 알 것이다. 자손 된자의 도리로서야 어찌 선조의영을 모른다고 하겠는가.』 고 역시 본도에 영을 내려 묘 만드는데 돕게 하였다. 『심의 후손인 廷最가 이 뜻을 쫓지 않고 경 等도 싸움을 벌리면 마땅히 엄벌하겠다』는 분부였다. 감신년(1764년) 5월 13일 夕講때에 承旨 金華鎭이 윤면교 등의 상소를 읽어 내려감을 마친 즉 왕이 가로되 『참으로 이상하다. 당총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나도 과연 믿지 안았는데 마침내 비선을 얻었으니 역시 성의의 소치라고 본다.』고 말하였다. 領相 洪鳳漢이 가로되 『신의 생각에도 이상히 여기는 바로소이다. 백여년간이나 잃었던 분묘를 지금에 와서 찾는다는 것은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아오리까』고 말하자 김화진이 아뢰되 『신은 윤면교의 집안과는 인척관계임므로 들었사온데 과연 여러달을 두고 확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여 舊碣을 얻었으니 그 정성과 함께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가로되 『과연 그렇다』 홍봉한이 여쭈어 가로되 『제신이 어찌 외손 된 자가 없을 수 있겠으며 전하 역시 그 외손이 아니옵니까. 특별히 돌보아 주어야 할 줄로 아옵니다』고 아뢰었다. 영조대왕께서도 그 윗대의 왕비가 우리 윤씨가 많았으니 외손뻘이 되는 것이다. 왕이 가로되 『백성을 다스리기가 극히 어렵다. 본 고을에서 造墓케 하라』고 하교하신 후 『예관을 보내어 지제케 하라』 하시었다. 당초 왕께서도 심정승의 혼령에 미안하다 하시고 同山所로 수묘를 하라고 하시었으나 심정최도 왕명을 어기고 자시의 조상에게만 좋도록 하려고 하였고 우리 종중에서도 심가의 소행에 원한을 품고 있는 터이라 그 후에도 분규를 수없이 거듭하여 상소가 연달아 올라갔다. 왕명이 비록 엄하였지만 양쪽의 싸움은 그칠줄 몰랐다. 최후에는 심정최와 添知公 熙復(남원파)을 왕이 친히 불러서 심정최로부터 비석을 파묻은 것과 옮겨 세운 것을 자복케 하시고 희복공에게는 公이 지나치게 왕에게 대들었다고 하여 죄를 다스렸으니 이는 즉 희복공이 왕에게 『대왕은 문숙공의 외손이 아니십니까』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심가의 묘예 계단을 없애고 공의 묘소를 成墳케 하고 다시는 유영찾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자손으로써 원한을 풀지 못하고 유한을 천추에 남기게 하였으며 이로써 무강공의 묘소는 영원히 찾지 못한 것이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 후손들이 유한을 억제치 못하고 영조 40년 갑신(1764년)에는 팔도의 제종 약 8백여명이 묘소 아래 모여 심가네 비석을 파 옮기고 문숙공의 신도비 감춘 곳을 찾고자 하다가 심가측과 충돌되어 편싸움이 벌어진 일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門長인 도사 벼슬을 지낸 희복공께서는 마침내 왕에게 대들어 죄를 다스림 받아 그 杖毒으로 원통히 돌아가시었으니 우리 종중의 원한이 어떠하랴. 그해 영조는 어제의 제문으로 『조선국왕은 都承旨 윤동섬(尹東暹)을 보내어 고려 윤문숙공의묘에 제사한다』고 하여 造墳과 동시에 치제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심가와의 통분으로 악연을 맺은 후손들은 그 분함을 어제치 못하여 종종 원한을 풀고자 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철종11년(1860) 10월 향사때에 玆山종인 勉甲이 심가의 비석을 쪼아내고 후손 義培는 향유사로써 경향 3파(파평, 남원, 함안) 여러 종중에 통문을 보애어 심가의 비석을 파묻자고 하였던바 심가들이 원한을 품고 와서 轎子 두 글자를 공의 비에서 벗겨 버렸는데 다음해에 斅獻公 敎成이 교자총비를 개수립하였고 음기는 孝文公 定鉉이 썼다.
8.15광복 후에 심묘를 상당한 보상을 주어 이장토록 하고자 후손들과 심씨 사이에 논의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심총을 파내어 버리자는 의논이 일부에서 일어나서 양주 종인 병순(炳淳)이 인부 심여명을 데리고 밤을 타서 심총을 굴총하였으나 워낙 계획적으로 견고하게 회를 이용하여 파묻은 탓으로 날이 밝도록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으니 원래 그들이 후일에 어떤일이 있으지 모른다는 먼 일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병순은 개성형무소에서 수개월간 옥살이 생활을 하였다.
백암안응창시유록(柏巖安應昌十遺錄)에 『고려명상(高麗名相 윤모의 의관과 신발을 좌수 분수원에 매장하였으되 다만 고찰할만한 각석(刻石)이 없어 후손들이 그 묘처를 일었다. 근세에 와서 심상지원 沈相之原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하였으니 이곳이 윤상(尹相)의 장산(葬山)이다. 흙을 팔 때 그 묘지(墓地)를 얻었지만 수습하여 쓰지 않고 묘지를 없앴으므로 윤씨가 그 분영을 찾지 못하여 전부가 심씨문중으로 귀속되었다』고 씌여있다.
심지원의 조부 종침(宗沈)의 장사날이 광해군 6년이니 그때 안응창의 나이가 12세였고 그 아버지 심설(沈偰)의 장사날이 선조 3년이요. 지원의 장사가 현종 3년으로써 처음에 장사지낼 때에도 청룡밖 이가산(李家山) 근처였는데 그 후에 이장하여 문숙공 산소의 상광(上壙)을 눌러쓴 것이다. 이와같이 심가들이 장사지낸 후 영조 정묘전(1747년)에 발간되었다면 우리 후손으로서는 근 백년만에 비로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선조의 묘소에 대해서 너무 등한시 하였고 후손들로서 성실치 못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후 서기 1950년 6·25 한국전쟁 이후에도 문숙공의 묘소에 대해서 심가측과 끈임없는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가 1969년 심총과의 사이에 곡장(曲墻)을 쌓았다. 공의 묘소에는 묘표음기(墓表陰記)가 있고 묘지가 있으며 또한 신도비가 있는데 묘표음기에는 공의 묘소를 실전한 것으로부터 되찾은 경위를 기록하였는데 21대손 정헌대부(正憲大夫) 전 공조판서겸 세자시강언찬선봉구공이 지으셨고 22대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 춘추관사 동섬(東暹)公은 전면에 큰 글자로 “고려수태보문하시중영평백 문숙공윤관지묘 (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伯文肅公尹瓘之墓”라고 쓰고 22대손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 방(坊)公은 음기를 쓰셨다. 그리고 묘지에는 공의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바 26대손 숭정대부이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자승(滋承)公이 쓴 것이다. 또한 신도비는 서기 1966년에 서울에 사는 후손 경수(敬秀)가 단독으로 성재를 내어 세운 것이다.
그후 당연한 귀결이지만, 파평윤씨대종회의 윤정원 대종회장과 청송심씨의 심명구대종회장간에 드디어 대의와 정의의 결단으로 심가 측의 분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2008년도에 파평윤씨 윤병철 대종회장 임기중에 심묘의 이장을 완료함으로써 윤·심간의 400여년간의 길고 긴 싸움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문숙공 윤관 대원수님의 편안함을 도모하게 되었다.
참으로 후손으로써 천추의 한이요, 그동안의 무수한 ㅅ건조님들께서 목숨과 피와 땀으로 헝클어진 역사를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 낸 것은 또한 조상님들의 은덕과 보살핌이 있어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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