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17. 07:24ㆍ☎열린자유글겔러리☎
한국 전쟁 The Forgotte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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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한국 전쟁은 냉전이 낳은 결과 중의 하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진주했던 미군과 소련군은 1949년에 각자의 점령 지역으로부터 철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미군은 남한의 이승만 정부가 북쪽으로 진격하여 무력통일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탱크나 대포 같은 공격용 무기들을 모조리 철수시켰다. 이에 반해, 북한의 소련군은 잘 훈련되고 중화기로 무장된 군대를 양성한 다음 철수하였다.
철수한 지 얼마 후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의 공산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쪽을 침략하였다. 다음날 남한 정부는 서울을 급히 떠났다. 이쯤 되자, 미국 정부는 한국군 단독으로 북한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남한의 방어를 위해 미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연합의 감시하에 실시된 선거에 의하여 탄생하였으므로 국제연합군도 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때 연합군 사령관에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임명되었다. 반격에 들어간 연합군은 1950년 10월 평양을 점령하고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중공군이 투입되어 국제연합군과 한국군은 다시 후퇴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터에 있는 야전군 지휘관들과 워싱턴 행정부 사이에서 이번 전쟁의 목표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 야전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주장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 개입한 이상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전면 전쟁을 해서라도 중공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와 의견이 달랐다.
"한국 전쟁은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제한 전쟁일 뿐이다. 중공과의 전면 전쟁은 피하고 대신 남한의 영토를 보존하는 정도로 전쟁을 한정시키자."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3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알려왔다
"미국은 공산측과 협상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공산측의 항복을 공공연하게 요구하면서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편지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트루먼은 한 달 후인 4월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켰다. 이에 대해 미국 내 여론이 심한 반발을 일으켰다. 해임 직후 실시된 어떤 여론조사에서는 69퍼센트가 맥아더를 지지하고 29퍼센트가 트루먼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민들은 해임된 후 귀국하는 맥아더를 개선장군처럼 환영하였다. 맥아더는 상·하 양원 합동의회에서 옛 군가의 일절을 인용하면서 그 입장을 밝혔다. <백과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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