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숙공윤관대원수 춘향제 (文肅公尹瓘大元帥 春享祭) 동영상

2016. 4. 17. 00:04☎파평윤씨네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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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윤관대원수 춘향제

(文肅公尹瓘大元帥 春享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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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윤관대원수의 묘역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405번지 여충사에서는 2016416일 파주시 유림의 주관으로 문숙공윤관대원수(文肅公尹瓘大元帥) 춘향제(春享祭)”가 전국각처에서 참석한 파평윤씨 후손과 그밖에 일반 참배객 300여명이 제관으로 참석한 가운데 여충사 사당에서 춘향제를 모셨다.

 

文肅公尹瓘大元帥 春享祭 祭官名單

 

[초관] 파주시 문화원장 이용근, [헌관] 파주시 유림연합회장 이영복, [헌관] 여충사장의 이기철, [례] 여충사장의 이승중, [자] 여충사장의 이재철, [전 례] 여충사장의 문동주, [당하집례] 여충사장의 문운공, [봉향] 여충사장의 유남형, [로] 여충사장의 허백술, [사준] 여충사장의 김천배, [] 여충사장의 정구채, [작] 여충사장의 조규철, [존 작] 여충사장의 정득채, [설]  정수창 이상 여러분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문숙공윤관대원수 춘향제 (文肅公尹瓘大元帥 春享祭)

 

여진을 징벌하여 9성을 설치하다.

 

관향이 파주인 성씨 가운데 대표적인 성씨는 파평윤씨이다. 파평윤씨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 파주이고, 파평윤씨 5세인 윤관대원수의 유적이 있는 곳이 파주이다. 그래서 파주는 파평윤씨들의 성역인 곳이다.

 

파주 3얼 가운데 이이 율곡과 황이 정승이 문관(文官)이라면 윤관은 장군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무관(武官)이다 그러나 윤관 장군은 고려시대 무관으로서의 명성을 떨쳐 무관직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문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고 시호(諡號)인 문숙(文肅)에서 알 수 있듯이 문무를 겸임한 인물이다.

 

윤관대원수는 우리 고장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동현(同玄), 호는 묵재(墨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고려 태조를 도운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이며 파평 용연에서 탄강했다는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이 고조부가 된다.

 

윤관대원수의 부친인 문정공이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꾼 후 부인 김씨에게 태기가 있어 그그를 낳았고, 문숙공 어머니는 신라의 마지막 경순와의 손녀다. 윤관대원수는 일곳 살에 이미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일찍 학문에 눈이 트였다고 한다. 윤관은 학문과 함께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나 재능을 보였다. 1073(고려 문종 27)문과에 등과하는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는데, 1102년 어사대부,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가 되었다. 11042월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이때부터 훗날 명성을 떨치게 된 여진정벌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104년 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한 토벌전에서 임간(林幹)이 패하자 윤관은 그 후 왕에게 전투력 증강을 진언하여 기병이 포함된 별무반(別武班)이라는 특수부대를 창설하고 양곡을 비축하는 등 여진 정벌을 위한 준비에 전력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1107(예종 2) 여진 정벌대의 원수로 임명되어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해 출발했다. 이 정벌에서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 거점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고 탈환한 9개 지역에 성을 축조하여 이른바 윤관은 9을 설치 하였다.

 

그러나 1109년 여진이 9성을 돌려주면 매년 조공을 바치겠다는 간계에 바져 애원하자. 그해 7월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윤관은 9성 환부 자체도 분한 일이었으나 반대파들로부터 퍄쟁의 모함을 받고 관직과 공신호조차 박탁당하기에 이른다. 이후 예종의 비로로 1110년 다시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고 말년을 우허지인 웅담리의 서재에서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111(예종 6) 5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며 천년한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윤관대원수는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 했다고 전해지며 그의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후대의 일가를 이루게 도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나 후에 문경왕후의 시호와 동일함에 따라 문숙(文肅)으로 바꿨다.

 

2. 왕릉 규모에 버금가는 묘역

 

윤관대원수 묘소앞의 윤관로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한양과 개경으로 통했던 유일한 길인 의주로(義州路)이다.

 

분수리는 고양시 고양동에서 혜음령 고개를 넘어 용미리 묘지로 잘 알려진 용미리 마을을 지나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역원인 분수원(焚修院)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마을 앞 의주로는 옛 국도 1호 답게 주변에 고려때 제작된 용미리석불입상이 위치하고 있으며, 최근에 발굴 조사중인 고려 전기 행궁지인 혜음원지가 위치하는 등 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길이다.

 

윤관 묘역에는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조성되어 있는데 먼저 봉분 아래에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을 두르고 봉분 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의 정면에 상석과 왼쪽에 묘비를 세웠으며 한 계단 아래 양쪽으로 망주석을 그리고 중앙으로 장명등을 세웠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각가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석양 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데, 망주석과 문인석 한 쌍을 제외하고 다른 석물은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윤관 장군의 묘소는 실전(失傳)했던 것을 조선 후기 영조 대 지석이 발견되어 조성된 관계로 묘역 내의 석물과 봉분 등 일체가 고려의 형식이 아닌 조선 후기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묘역 아래는 윤관 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10일과 음력 105일 년2회에 걸처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여충사 삼문 바깥쪽 좌측에 새로 건립된 교육관 건물이 있어 충효관이라고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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