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편집] 지켜 낸 숭고한 가치 (9.28수복) / 북한을 찬양하는 무리들을 배척한다.

2013. 3. 12. 11:35☎시사(時事)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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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 낸 숭고한 가치 (9.28수복)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지금은 철거된 옛 조선총독부관저)에 태극기가 게양됨으로써 서울 도심의 공방전은 종결되었고 지금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던 적은 전의를 상실하고 북으로 패주하였다.  이로써 수도 서울은 6월 28일 적에게 피탈된 지 정확히 3개월 만에 수복되었다.


 
         
                                1954년 9월28일 4주년 행사 당시의 태극기게양 재현모습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난 9월 28일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서울중심부 일원에서 벌어졌다.  특히 이번에는 10월 1일 국군의 날 기념식도 앞당겨 함께 개최되어 다채로운 각종 행사가 열렸다.  특히 서울 도심에서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각종 군용기들의 시범 비행이 선보여 많은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
 

    
                                      지난 9월 28일에 열린 서울수복 60주년 행사


 
이처럼 9.28수복은 엄청난 의의가 있는 사건인데, 6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막상 그 뜻을 제대로 아는 이들이 드문 것 같다.  9.28수복의 의의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일상(日常)으로의 회귀라 표현할 수 있다.  산소가 부족한 곳에 가서야 그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듯 당연하게 대하여 오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9.28수복은 똑똑히 알려준다.

 
   
                           너무 시간이 흘러서인지 9.28수복의 진정한 의의를 잊고 있다


 
일상이라 표현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자유를 뜻한다.  서울이 피탈된 후 적 치하에 남겨진 150만의 서울 시민들은 곧바로 무시무시한 폭력과 공포를 겪으며 극심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남북 간의 이념과 체제차이에 따른 갈등을 뛰어넘어 힘을 가지고 있는 자가 한 없이 약한 이들을 상대로 자행한 무자비한 테러라 단언 할 수 있을 정도다.  다음은 이에 대한 생생한 증언들이다.

          
                                    
남로당의 환영을 받으며 서울로 진입하는 북한군 전차부대
                         이후 점령 북한군과 남로당은 서울을 공포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곳곳에서 ‘반동’으로 몰아 즉석 처형하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김원일 씨는 “민심이 너무 나빠져 인민재판이 점령 3일 만에 중단됐다”고 말했으나, 이현희 교수와 이원경 씨는 “7, 8월에도 계속됐다”고 회고했다. 인민재판은 잔인성 못지않게 일관성 없는 기준으로 반발을 샀다. (2010년 9월 27일 동아일보)

 
    
                         시민들을 인민재판한 후 총살을 위해 집행장으로 끌고 가는 모습
 

한번 내몰린 적들은 도망가기에 바빴고 이를 본 시민들은 기쁨의 눈물로 국군을 맞았다고 노병은 기억합니다. <인터뷰> 강동구(예비역 준위) : "그 때 왜 이제 오느냐 울면서 울며불며 그랬는데 우리도 같이 따라 울었어요. 울면서 전투한 거 에요." (2010년 9월 28일 KBS 뉴스)

 
          
                           서울 점령기간 동안 벌어진 정치 선동행사 (사진-동아일보)
 

숨어서 지낸 3개월이 마치 30년 같았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만큼 무차별 학살과 탄압이 자행되던 이른바 ‘인공(人共)통치 3개월’이라 언급되는 이 시기는 우리에게 씻기 힘든 커다란 상처를 안겨주었고 이것은 이후 전쟁 그 자체보다 더 크게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리 갈라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인공치하 3개월간의 폭압 통치는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남겨 주었고

                         이것은 남북 간을 심리적으로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이유가 되었다
 

인공통치 3개월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석 달 뒤에 있었던 1.4후퇴다
서울이 공산군에게 재점령 될 위기에 놓였을 때 혹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피난길에 올랐다.  중공군이 폐허가 된 도시를 재점령 했을 때 서울은 거동이 불편한 일부 노약자들만 남아있던 텅 빈 도시였다. 

           
                                혹한도 자유를 찾아 떠나는 서울시민들을 막지 못하였다

                                지난 인공통치기간 동안의 악몽 때문이었다 (사진-LIFE)
 
몇 십 년 만의 혹한이라는 1950년의 추위도 자유라는 일상을 또다시 포기할 수 없었던 서울시민들의 탈출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그만큼 1950년 여름에 있었던 북한의 서울 점령 3개월은 너무나 잔혹한 기억이었고 그러한 공포로부터 일상을 회복시켜준 9.28수복의 의의는 실로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9.28수복은 숭고한 가치를 지켜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진-뉴스엔)
 

바로 폭력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이끈 9.28수복을 경축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6.25전쟁에서 수많은 피와 눈물을 바쳐가며 끝까지 우리가 지키고자 하였던 지고지순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앞으로도 소중히 지켜야 할 유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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