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15. 17:27ㆍ☎청파의사는이야기☎
파평윤씨 시조 고려태사 윤공 "신달" 시묘제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 묘역
고려태사 윤공 신달 지묘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 시묘제에 참석한 일행들과 함께 기념 사진을
고려 태사공 “윤신달”할아버지 후손이란 것 자랑스러워
우리나라 속담에 ‘자식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 했다는데 그런데 나는 이번 기사에 자식 자랑이 아닌 나의 ‘조상님 자랑을 하려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사를 쓴다. 자칫 어떻게 생각하면 “자화자찬” 같아 조상님께 일면 조심스러운 면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척박한 세상에 자신의 성씨에 대한 시조 할아버지 추향제를 모시려고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파평윤씨 후손들의 기사를 써 보려 한다.
내가 파평윤씨 태위공파 남양공손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파평윤씨 집성촌 종친회장직을 맡아 임무 수행을 하지도 어언 6년여 지났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파평윤씨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 莘達)”할아버지 묘소를 한 번도 참배하지 못해 늘 마음속에 조상님과 우리 문중 종친 여러분은 물론 사랑하는 내 자식과 손자 아이에게 면목이 없었다. 그런 줄 알면서도 우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업 관계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런 위인이 우리 문중 종친회장직을 수행한다는 사실이 어떻게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내 조상도 잘 모르면서 무슨 종친회장직’을 맡아 일을 보느냐는 무책임론이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가을엔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내 “고 려태사 윤 공 신달(高麗太師尹公 莘達)”시조 할아버님 묘소참배를 하기로 한다. 타 문중 종친회에선 종친들이 다 같이 버스 전세를 해 시조 할아버지 묘역에 참배를 다녀왔다는데….
마음은 나도 그렇게 많은 종친을 모시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 莘達)”묘역을 참배하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지만, 올해는 우선 내가 먼저 참석해 현지 실정을 알아보고 내년쯤 단체 참배를 하기로 생각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기도 파주시와 내가 사는 인천에서 포항시 기계면까지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 莘達)”묘역 참배를 위하여 찾아가는 일은 생각처럼 그렇게 녹녹치만은 않은 일이다.
문제는 나도 내년이면 고희 나이다 보니 단거리 운전과 달리 왕복 800여 킬로를 운전하고 다녀오는 일이만만치 않아 앞으로 우리 문중 대소사 일을 자연스럽게 의논할 수 있는 조카에게 연락하니 개인 사업자가 되어 바쁜 와중에도 선뜻 ‘아저씨 알았습니다. 제가 운전하고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연락을 받고 13일 오후 5시 반 4명이 승용차 편으로 인천에서 출발한다.
포항까지 가는 데만 400여 킬로 거리가 되다 보니 갈 길이 멀어 가는 도중 휴게소 2번 들리고 열심히 달렸건만 밤 10시나 되어 포항시 안강면에 있는 모텔에 여장을 풀고 너무 늦은 시간이라 간신히 문이 열린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 한잔하고 1박을 한 후 이튿날 (2012.11.14)새벽들이 일어나 인근 해장국집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서둘러 반시간여 달려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태사공”묘 전에 도착하니 8시다.
마침 우리가 선착순 도착을 했기에 좀 더 있으면 “태사공” 할아버지 추향제 에 참석하신 종친들 차량 행렬로 얽히고설키는 교통 혼잡으로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 “태사공” 할아버지 신도 비 주변에 주차하고 묘역까지 도보로 간다. 그런데 이날 기자가 처음 이곳 “태사공” 할아버지 묘역을 찾으며 느낀 소감은 이곳 포항시와 기계면에서는 “고 려태사 윤 공 신달”할아버지를 상당히 높이 추앙 [抽仰] 해 모시는듯한 분위기다.
거리 곳곳에 “고 려태사 윤 공 신달”묘역의 위치를 알리는 거대 대리석 입석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난생처음 “태사공” 할아버지 묘역을 찾는 후손의 어깨가 으쓱해질 정도다. 그 모습을 보며 아 ~ ! 우리 파평윤씨 시조이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할아버님의 위업이 과거나 지금이나 상당히 추앙받으시는 큰 어르신이었다는 사실을 몸소 느끼게 된다.
태사공 할아버지 묘역까지 가는 도로변엔 아름드리 노송들이 빽빽이 들어서 마치 왕릉에 온 분위기와 흡사하고 입구 홍살문을 지나 “봉강재(鳳岡齋)”에 들어서니 전형적인 우리나라 기와집 고택이 여러 채로 나뉘어 한 채를 이룬 보강재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그 봉강재 재실마다 어제저녁 각처에서 태사공 묘제에 참석차 오신 파평윤씨 후손 종친들께서 하룻밤을 묶으시고 아침 식사를 하시는 모습도 보이고 추향제 준비로 손길이 바쁘다.
봉강재 (鳳岡齋)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893∼973)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장성한 뒤에는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영조 28년(1752) 그의 28대손인 윤광소가 안동부 사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10년 뒤인 영조 38년(1762) 26대손인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보수하고 안동 부사였던 유성대가 땅을 넓히고 고쳐 지었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전체적으로 ㄱ자형 평면구조로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춘 기법이 우수하며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자료 201> 참조
봉강제 관람을 마치고 기자는 먼저 일행들과 함께 저만큼 하늘이 닿을 듯 올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있는 “태사공” 할아버님 묘역에 올라 참배를 마치고 돌아서 일대 풍치를 살피니 내가 무슨 풍수지리의 문외한인데도 한눈에 이곳 “태사공”할아버지 묘역이 범상치 않은 명당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후손으로서 어깨가 으쓱해진다.
오전 11시가 되자 드디어 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이신 태사공(太師公) 시묘 제가 거행되는데 봉강재에서 태사공 묘역까지 200여 미터 넘는 묘역 오름길에 이날 제관에 임명받으신 집례와 (초헌, 아헌, 종헌 관) 뒤를 따라 늘어선 전국에서 시묘제에 참석하신 파평윤씨 후손 인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들어졌다 제단 아래 부복하신 파평윤씨 후손님들의 수가 어림 참아 천여 명은 되는 것 같다.
이날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 莘達)”시조 할아버지의 시묘제(時墓祭)는 산신(山神祭)제에 이어 집례의 진행에 따라 (초헌관, 아헌 관, 종헌 관)의 시조 할아버지께 잔 올리는 순서를 끝으로 “고 려태사 윤 공 신달 (高麗太師尹公 莘達)”파평윤씨 시조 할아버지의 시묘제를 모두 마쳤다. 시조 태사공 휘신달 약사 (始祖太師 公 諱 莘達 略史)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라(新羅)의 천 년 사직(千年社稷)이 붕괴(崩壞)하고 후삼국(後三國)의 혼란기(混亂期)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再統一)되는 역사적(歷史的)인 일대 번역기에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위인(偉人)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同僚)들과 협력(協力)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여 백성(百姓)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 공훈으로 (王建) 태조(太祖)로부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2등 공신(二等功臣)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관작(官爵)은 태부(太傳) 퇴보(太保)와 더불어 3공(三公)의 예후(禮遇)를 받는 직위(職位)였다.
공(公)의 휘(諱)는 신달(莘達)이요 일휘(一諱)는 협심이시며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시다.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癸丑) 음력(陰曆) 8월15일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공(公)께서 파평산(坡平山)과 용연(龍淵)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게 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公)께서는 자라나시면서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또 파평산(坡平山)에 올라가 무술(武術)을 연마하신 후 성년(成年)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國王)으로부터 그 재상(宰相)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졌다. 그 재상(宰相)이 자택(自宅)에 돌아와서 제문(祭文)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
하시면서 의군신지유죄감수재앙(宜君臣之有罪甘受災殃) 해초목지무지등몽초열(奚草木之無知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宰相)에게 제시하시자 재상(宰相)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제문(祭文)을 지어 국왕(國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 무지한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 재상(宰相)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官職)에 오르시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文獻)은 없다. 그후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百年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地方民)들로부터 그곳은 윤능골(尹陵谷)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新羅) 유민(遺民)들이 태사공(太師公)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東京)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에 충성스러운 백성(百姓)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公)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기고 경주(慶州) 일개군(一個郡) 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중략 <파평윤씨 홈페이지 참조>
홍살문을 지나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 묘역과 봉강제에 갈 수 있다.
여기부터 봉강제 이다.
멀리 하늘이 닿을듯 높은곳에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 묘역이 올려다 보인다.
시조할아버지 묘역에서 내려다본 봉강재
봉강묘 (鳳崗廟) 가는길에 팔도 파평윤씨 종친회에서 세운 입석비 모습이다.
봉강묘 (鳳崗廟) 가는길에 팔도 파평윤씨 종친회에서 세운 입석비 모습이다.
봉강묘 (鳳崗廟)
봉강묘 (鳳崗廟) 재실
봉강묘 (鳳崗廟)
재실 안 위패를 모시는곳
봉강묘 (鳳崗廟)
봉강묘 (鳳崗廟)앞 아름드리 노송이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의 역사를 증명하는듯 우뚝선 모습이 듬직하다.
뒷면에서 본 봉강묘 (鳳崗廟)
뒷면에서 본 봉강묘 (鳳崗廟)
태사공 시조 할아버지 시묘제를 위하여 제관과 집례 그리고 후손들이 묘역을 향하여 오르고 있다.
제단에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제단에 제물을 진설하고 있다.
초헌, 아헌, 종헌관 모습
드디어 집례 어른의 진행으로 시묘제가 시작 되었다.
먼저 산신제를 모신다.
시조 할아버지 시묘제를 모두 마치고 우리는 내친김에 우리나라 지도 토끼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호미곳" 해맞이 광장을 돌아보고 물회에 과메기 맛을 보고 귀가하니 밤 9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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