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벌초 축제"이야기 [사진&동영상]

2010. 8. 30. 10:15☎청파의사는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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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초 축제"이야기 [사진&동영상)
벌초 축제를 아시나요 // "2010 청파 가족의 벌초 축제 이야기
윤도균 (ydk3953)

 

   
▲ 우리집 납골묘 모습 비가 내리기전 서둘러 말끔히 벌초를 끝낸 우리가족 납골묘 (좌측에 와비, 가운데 48기용 납골묘 우측 가족납골묘 비석)
ⓒ 윤도균
납골묘
   
▲ 우리집 벌초축제 이야기 매년 이맘때면 우리가족 납골묘에서 20여명의 가족들이 모여 벌초를 하는데 마치 벌초 축제처럼 온가족이 화기애애한 가운데 진행이 된다.
ⓒ 윤도균
벌초축제
10년 전 벌초 할 때에는 언제나 나와 동생 그리고 사촌 동생 두 사람이 모여 고향 선산 12곳에 산재돼 잠들어 계신 조상님 묘소에서 온종일 뻘뻘 땀을 흘리며 고생을 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하루에 벌초를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에 잡초가 무성했다. 풀 깎는 일도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묘가 한 곳에 모여 있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다 보니 여기 한 곳 벌초를 끝내고 또 건너편 산속에 있는 조상님 묘소로 이동하는 시간도 많이 걸렸다. 또 묘지를 찾아가는 길이 사람이라곤 일 년에 우리가 한 번씩 다니다 보니 완전히 가시덤불 숲길로 이어져 무더위에 팔다리가 찢겨 피를 보는 일들이 허다했다.

 

또 그 시절엔 왜 그렇게 쐐기도 많았는지 반소매 옷을 입고 방심했다간 영락없이 쐐기에 쏘여 살갗이 부르트고 그 통증이 며칠씩 계속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속됐다. 드문드문 풀과 함께 자란 나무를 깎다가 말벌 집을 건드려 그렇지 않아도 무더위에 열이 나 있는 상태에서 벌이라도 한 두 방 쏘이면 그 고통으로 자칫 혈압 있는 사람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런 힘든 상황을 겪으면서도 '아버지 어머님과 그리고 형님'들 외, 한 번 얼굴도 뵙지 못한 윗대 조상님 벌초를 위하여 고생해야만 했다.

 

   
▲ 벌초를 하는 모습 우리집안 벌초에는 사촌 동생 두 사람이 큰 일을 다 한다. 도회지에서 온 자녀들은 모두 오촌 아저씨들이 깍을 풀이나 갈퀴로 긁어 내는것으로 일조를 한다.
ⓒ 윤도균
벌초

그런데 문제는 우리야 어차피 주어진 운명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고생이라 치더라도 만약 우리가 노쇠하여 일 할 수 없을 땐 이 여러 곳의 조상님 묘 벌초 관리를 누가 하겠는가?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낫 놓고 낫'인 줄도 모르는 아이들이 과연 우리 대를 이어 조상님 벌초를 해낼 수 있을지 늘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생각한 것이 조상님들께 큰 결례가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후세들이 지속적으로 우리 집안 조상님들에 대한 묘 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우리 집(큰집) 4형제와 (둘째) 삼촌 댁 사촌 동생 2명 그리고 (막내) 삼촌 댁 동생 3명의 동의를 얻어 고향땅 선산 곳곳에 흩어져 모신 조상님들 묘소를 개장·화장해 모셔 '우리 집안 가족 납골묘'를 설치하기로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그런데 한창 납골묘 설치 공사 시작 단계에 이르렀는데 유감스럽게 둘째, 셋째, 삼촌네 사촌 동생들이 모두 기존에 모신 부모님 묘소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매장으로 모시겠다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예초기로 풀깎는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가족들 사촌동생이 예초기로 잔디 깍는 모습을 보고 있어요
ⓒ 윤도균
벌초

어쩔 수 없이 두 사촌 동생네를 빼고 우리 형제끼리 6대조 할아버지, 할머니 이하 조상님 납골묘를 설치하기로 하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요즘 문화와 달리 그때 당시 분위기는 조상님 묘는 웬만해선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유교적 분위기가 우선하였다. 이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납골묘 설치공사를 할 때 심지어 고향마을 어르신들께서 납골묘 조성공사 현장에 와 보시고 백여 년도 넘게 무탈하게 이어져온 조상님의 묘를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불손이라 하시며 혀를 차기도 하셨다.

 

그러나 나는 어르신들께 당당하게 말씀드렸다. 지금이야 힘이 들어도 우리 형제들이 벌초하며 묘 관리를 하고 있지만 당장 10년~15년 후에는 누가 그 여러 곳 묘소를 찾아다니며 벌초를 할 것이냐고? 만약 그때까지 우리가 일할 수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 못하고 아이들이 관리를 못 하게 된다면 아이들은 아무 죄도 없이 애매하게 조상을 외면한 자식들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고 자연적으로 조상님 묘는 어쩔 수 없이 고청이 되어 마치 무연고 묘지처럼 관리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 어떻게 당장 몇 년을 내다볼 수 없는 '재래식 벌초' 방식만 고집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 간식 시간 무더위에 땀 뻘뻘 흘리며 벌초를 하다 잠시 간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가족들
ⓒ 윤도균
가족여행

앞장서 납골묘 조성을 추진하는 내가 조상님들께 불효막심한 후손으로 낙인찍히게 될지 모른지만, 앞으로 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오래오래 조상님은 물론 훗날 우리 형제들이 그곳 납골묘에 묻혀 후세들의 돌봄 속에 납골묘가 잘 유지·관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다소의 무리를 무릅쓰고 '가족 봉안묘' 조성을 강행하는 것이라고 어르신들께 설명을 드렸다. 일부 어르신들은 머리를 끄덕이시는가 하면 또 어떤 종친 어르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기도 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변하지 않고 납골묘 조성을 강행하여 드디어 2002년 3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용산동 선향에 '파평윤씨 남양공손 태위공파 가족납골묘(48기용)'를 건립하였다. 제일 윗대 조상님의 묘소부터 개장하여 현장에서 화장을 모셔 유골을 분쇄하고 계수나무 납골함에 안치해 모두 10분의 조상님과 나의 손위 두 분의 형님 납골을(12분) 안치하였다.

 

   
▲ 어느덧 내가 우리 가정의 어른이 되었다 동생들과 함께 (왼쪽 필자, 가운데 손아래 동생, 우측 사촌동생)
ⓒ 윤도균
동생,

그리고 내친김에 조상님 10분의 기제사를 장손인 큰 형님댁에서 모시는데 몇 년 전 큰 형님께서 우환으로 고생하시게 되니 몸이 불편하신 형님께서 장손이라는 책임 때문에 당신 건강도 안 좋으신 형님께서 기제사를 모시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였지만, 솔직히 요즘 같은 바쁜 세상을 살다 보니 물론 정성이 부족한 원인이겠지만 바쁜 업무로 어떤 때는 자손으로서 기제사 참여가 부담스럽고 여의치 않은 애로가 있어.

 

그래 기왕지사 나선 김에 기제사 모시는 제례 방식도 현실에 맞게 개선을 하자 생각을 하고 형제들과 협의하여 매년 청명 한식 일요일 "우리 가족 납골묘"에서 조상님들 기제사를 모시기로 하고 실행을 하니 처음에는 일면 생각하면 내가 너무 조상님들을 가볍게 생각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좋은 것은 더 좋게 나쁜 것은 과감하게 개선"한다는 의지를 갖추고 강행을 하다 보니

 

   
▲ 48기용 납골묘 봉분 벌초를 48기를 모시는 납골묘 봉분위에 필자가 벌초를 하고 있다.
ⓒ 윤도균
납골묘

 

지금은 오히려 그 당시 납골묘 조성하고 기제사 모시는 제례 법 개선한 것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우리 자식들에게 부모들이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체험의 현장"이 되어 매년 4월(청명 한식) 일요일이면 조상님 기제사를 모시려고 각처에 사는 가족들 참여도가 20여 명이 넘나들 정도이고 심지어 시집간 누이들까지 자녀와 함께 아버지 어머니 기제사에 참석할 정도이니

 

이 결과만 보아도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보기 드물게 가족 화합과 단합을 이루며 "조상님 모시기 새로운 문화" 정착에 이바지하였다는 자부심을 같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새로운 조상님 섬기기 방안은 기제사 문화 개선으로 끝나지 않고 그 옛날 십여 곳이 넘는 조상님 묘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힘들게 하던 벌초가 되어 오죽했으면 필자 자신도 기피 현상을 보이던 재례식 벌초 문화를

 

   
▲ 비를 피해 제사 준비를 한두방울씩 내리는 비를 피해 제물을 진설하고 있는데 억수같은 폭우가 내려 약식으로 잔을 올린다.
ⓒ 윤도균
벌초제

 

지금은 우리 4형제 가족 전원 참여는 물론이고 사촌 형제·자매들 심지어 출가한 누이들까지 외손자 사위까지 참여하여 벌초에 작업에 참석하고 있어 지금은 우리 집 벌초 날은 "가족 만남의 날, 또는 벌초 잔치"로 변화하여 핵가족 시대에 보기 드물게 대단위 가족 만남 상봉 화합의 날로 발전하여 벌초는 1시간여면 모두 끝내고 온 가족이 대형 텐트에 모여앉아 고기를 구워 조상님께 먼저 "벌초제"를 지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어지는 새로운 우리 가족 상봉 문화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느긋하게 이어진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국지성 호우가 지속하여(2010.8.28 일요일) 비를 피하고자 서둘러 인천에서 서울에서 고양에서 벌초에 20여 명이 참석하여 벌초를 모두 다 끝내고 조상님께 제를 모시려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천둥 번개를 치며 얼마나 굵은 세찬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지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올해는 차려온 제물도 제대로 진설하지 못하고 간신히 비를 맞고 조상님께 잔을 올리고 서둘러

 

 

   
▲ 제사를 모시고 헌주를 모시는 가족들 제사를 모시고 나면 따라놓은 잔을 들어 납골묘에 안취된 조상님 비문앞에서 봉분위에 술을 따라 헌주를 모시는데 이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려 약식으로 진행한다.
ⓒ 윤도균
헌주

 

내가 우리 문중의 종친회장직을 맡은 고향마을 "용산 제" 재실로 이동하여 재실에서 고향마을종친 어르신 형님 내외분들 모시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점심 겸 가족회의가 진행되는데 이 자리에서 우리 문중의 종손이신 형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도균이 네가 그때 납골묘 공사할 때 나도 반대를 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너의 가족들이 하나로 단합된(사촌, 오촌, 육촌, 칠촌, 심지어 외손자)까지 참석하는 모습 보이며

 

새로운 벌초문화를 이끌며 너의 집안 똘똘 뭉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라고 하시며 요즘 세상에 벌초하는 날 이렇게 20여 명의 대가족이 모이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보기 좋다고 하시며 앞으로는 형님댁은 물론 우리 종친들도 모두 다 자네네 처럼 납골묘 조성하여 이렇게 "벌초문화"도 개선하고 가족 단합 계기도 만들어야 한다는 격려의 말씀을 하여 주시며 너 정말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하시며 따라 주시는 형님의 술잔이 얼마나 꿀맛 같던지…….

 

   
▲ 비를 피해 이동을 얼마나 집중 호우가 쏟아지는지 자리를 비해 재실로 이동중이다.
ⓒ 윤도균
집중호우

 

그런가 하면 이날의 우리 가족 벌초 참석자 중 제일 막내인 필자의 손자 (초등학교 3학년) 아이는 할아버지 귀에 대고 할아버지 오늘 집에 있었으면 온종일 오락하고 놀 텐데 할아버지 할머니 따라 참석하여 너무 좋은 모습을 보고 배운 것 같다고 하며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며 뽀뽀를 해주는 손자녀석을 보면서 '비록 내가 남들 앞에 내놓을 것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조상님 잘 모시고 가족 화합분위기 조성"만큼은 그 어디 내놔도 자랑할 수 있고 앞장섰다고 자부한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이날의 벌초 이야기는 용산제 재실에서 식사와 회의를 끝으로 모두 끝을 맺고 온 가족들이 모두 나에게 다가와 형, 오빠, 아저씨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5 ~ 6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내년에도 꼭 올게요.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과 함께 무언가 해낸 듯한 뿌듯한 마음이 이제는 조상님들 앞에 결코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어 마음이 흡족하다.

 

   
▲ 재실에서 점심을 하며 가족회의를 집중 호우를 피해 재실로 이동하여 마을 어르신들을 모신 가운데 식사를 하며 가족회의를 하는 모습
ⓒ 윤도균
가족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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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의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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