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역사 탐방 새해 첫 산행길

2009. 7. 22. 01:05☎청파의사는이야기☎

728x90

 

 

 
[남한산성] 역사 탐방 새해 첫 산행길
윤도균 (ydk3953)
   
▲ 남한상성 역사탐방 산행길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민족의 아픔이 서린 남한산성 역사탐방 산행으로 2009 그 첫 산행을 시작한다.
ⓒ 윤도균
남한산성
 
힘들고 어려웠던 한 해를 덧없이 보내고 …….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였다. 그러다 보니 먹기 싫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올해도 또 그 먹기 싫은 나이 한 살을 더 먹어야 하는 안타까움이 새해 초부터 내 마음에 부담으로 자리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이제 새해라는 단어가 나에게 무슨 큰 의미나 희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이런 내 기분과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올해도 그 새해는 변함없이 찾아오고 말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새해가 되었다고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꿈꾸며 희망찬 미래를 설계 하며 밑그림도 그리고 특히 나 처럼 산행을 좋아 하는 산님들은 새해 일출 산행이다 법석을 떨며 가는 해와 새해 사이에 얽히고 섥킨 스켓쥴 조정들 하며 바쁘게들 보내고 있는데……. 이 도영이 할 베는 그믐이 되어도 새해가 된다고 하는데도 반갑지가 않다. 아직 마음은 누가 나를 낡은이라고 하문 듣기 싫을 정도로 아직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 왔는데 …….
 
왜 ? 그 반기지 않는 새해는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내 앞에 와 아른거리며 떡국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하고 생으로 나를 6학년 6반 학생으로 날 진급을 시켜 주려고 안달이 났는지……. 할 수 만 있다면 이제 더 이상 1학년 진급하지 않고 차라리 유급을 당해서라도 그냥 6학년 5반 그 자리에 더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하늘같이 간절한데도…….기어코 나는 2009년 새해 타종 소리를 들으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6학년 6반으로 기어코 진급을 하고 말았다.
 
일면 이렇게 해마다 연말만 되면 나이 한 살 더 먹기 싫어 바둥거리는듯한 내 모습이 어떻게 생각 하면 세차게 강풍이 불어오는 높은 산 정상에서 바람에 순응하여 흔들리지 않고 그 강풍에 버티고 서있으려던 고목이 혼자 강한 척 떡 버티고 서 있다가 결국은 강풍을 이기지 못하고 가지도 아닌 몸통째 반동강이가 되어 쓰러진 고목의 모습처럼 …….행여 나도 이 시대 억지로 버티려 기를 쓰다 행여 반 동강이 나지 않을까 조바심을 하면서도 …….
 
바보처럼 나 자신을 낮출 줄 모르고 오늘을 살고 있다. 아마 이런 내 모습을 교만이라 하는 것이 아닌지 …….새삼 가는 송년과 2009 새해 앞에서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아무쪼록 기축년 2009" 새해에는 우리나라 온 국민들 모두 활짝 웃을 수 있는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새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 하면서 새해 초 모든 잡념을 잊고 새 각오를 다지기 위하여 "이조 16대 인조대왕 시절 축조하여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성을 내 주고 말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인 남한산성"을 찾아 역사 탐방 산행이나 한 바퀴 휘 돌아보기 위하여 산행을 떠난다.
 
   
▲ 성불사일주문 남한산성 입구 들머리 조금지나 있는 사찰
ⓒ 윤도균
성불사

마천역 홈을 빠져나와 약 100여 m 전방으로 진행을 하다 좌측 인도로 700여 미터 진행을 하면 우측에 공수부대를 지나 그곳에서 계속 진행을 하면 등산장비 매장이 많고 먹자 거리가 함께 하는 상가 지역을 지나게 되는데 이날우리들의 남한산성 역사탐방 산행 길은 등산장비 점에서 좌측으로 들머리를 시작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산행 시작된다.
 
우리들은 이날 마천역 = 체력단련장시설 = 연주옹성 = 서문 = 수어장대 = 영춘정 = 남문 = 제1옹성암문 = 제2옹성암문 = 제3남옹성 = 동문 = 장경사 = 장경사진지옹성 = 동장대 = 용암성 = 벌봉 = 동장대암문 = 남한산성성곽길 = 북문 = 연주옹성암문 = 하산시작 = 만남의 다리 = 상가 거리 = 마천 역으로 원점 회귀 산행을 하게 된다.
 
   
▲ 연주봉옹성 그러나 남한산성 등로 이정표에는 용주봉옹성으로 오기되어 있다
ⓒ 윤도균
연주봉옹성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산행을 다녀온 후 남한산성 역사 자료를 아무리 뒤져 보아도도 남한산성에 "용주봉 옹성"이란 자료는 발견할 수 가 없다 내 생각에는 아마도 "연주봉옹성"을 오기하여 "용주봉옹성"이란 이 정목을 세운 것 같다 그런데도 해당 지자체는 이 잘못된 이 정목을 계속 몇 년째 방치하고 있다. 해당 지자체님들 이젠 더 이상 묵과하지 마시고 잘못된 이 정목 표시 "연주봉옹성"으로 수정을 하여 주세요
 
   
▲ 남한산성 남한산성 성곽을 따라 산행이 시작된다.
ⓒ 윤도균
남한산성

남한산성 성곽은 기본적으로 원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원성은 인조 2년(1624)에 수축한 남한산성의 영역으로서 하나의 폐곡선으로 연결될 수 있는 본성을 의미한다. 이외에 외성으로는 동쪽에 봉암성과 한 봉성이 있고, 남쪽에 신남성이 있는데 이곳에는 동·서 두 개의 돈대가 구축되어 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의 규모와 면적에는 많은 이론이 있었다. 『광주군지』에는 8km 정도라고 기술되어 있으며 1 : 5,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한 GPS측정 결과 산성의 둘레는 옹성을 포함하여 10,841.5m으로 확인되었다.
 
이것은 남한산성에 대한 정확한 측량이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지』에서는 성벽 안 둘레는 6,290보로 17라반이고, 바깥 둘레는 7,295보로 20리 95보이며, 성가퀴는 1,940타이고, 5옹성과, 16개의 암문, 125개소의 군포, 4개소의 장대가 있다고 하였다. 안 둘레는 7,853.6m이고, 바깥둘레는 9,108.5m이다. 그런데 최근 토지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밀 측량을 한 결과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기존에 알려져 있던 것 보다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성벽의 둘레를 측량하는 방법은 성벽외곽 기단부나, 여장 안쪽 기저부, 여장 옥개 중심선을 기준으로 하는 등 세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 기준은 여장 옥개 중심선을 따라 측정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도 여장 옥개중심선을 따라 측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옹성과 외성을 포함한 남한산성의 전체 규모는 둘레가 12,355m이고 폐곡선을 이루지 않는 한 봉성을 제외한 성내부의 면적은 2,209,270㎡(약 668,303평)으로 확인되었다
 
그중 원성은 대부분 인조 2년(1624)부터 인조 4년(1626)까지 축성된 것으로 전체 둘레는 7,545m이고, 성 내부의 면적은 2,216,637㎡(643,307평)이다. 원성의 성벽은 사각추형으로 정연하게 다듬은 성돌을 사용하였다. 남벽과 북벽의 일부가 훼손된 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 돈 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 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 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 주봉 옹성, 한 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 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
 
   
▲ 수어장대 멀리 수어장대가 조망된다.
ⓒ 윤도균
수어장대
 
   
▲ 수어장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
ⓒ 윤도균
우리산내음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서쪽 주봉인 청량산 정상부에 세워져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 물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2층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2동의 사당인 청량 당으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은 선조 28년 남한산성 축성 당시 동남 북의 3개 장대와 함께 만들어졌으며 유일하게 현존한다. 원래 단층누각으로 축조하고 '서장대' 라 부르던 것을 영조27(1751)에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고 안쪽에는 무망루, 바깥쪽에는 '수어장대' 라는 편액을 내걸었으며, 서대라고도 불렀다.
 
수어장대의 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 상층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양식의 2층 누각이다.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 루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 3칸, 측면 2칸만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2층은 1층 우측 뒤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다
 
   
▲ 남한산성비 사적 57호
ⓒ 윤도균
남한산성비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 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 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 봉은 예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 봉에는 천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 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 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 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 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 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 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 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 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 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 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천태종이 벌 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 동문누각 동문을 지나 급경사로 이어지는 목 계단길을 따라 우리들은 다시 암문 (장경사싱지옹성)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 윤도균
동문누각

   
▲ 벌봉정상에서 천태종과 관련한 유래가 있는 벌봉 정상에 올라 일행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간다.
ⓒ 윤도균
벌봉

이날 우리들이 남한산성 역사 탐방구간은 대부분 성과 외곽을 돌아보는 코스로 잠시 성곽 안에 위치한 수어장대를 돌아본 후 다시 성곽 담을 끼고 도는 평지 코스가 대부분이며 이 구간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가는 곳 마다 빽빽하게 성곽을 따라 분포되어 자생하고 있었으며 병암이라 하여 소나무 그늘아래 우뚝 선 두개의 바위에는 음각으로 정조때 산성 서문 근처가 파괴된 것을 주민들이 자진하여 보수 하였으므로 당시 부윤이 이를 찬양하는 글을 이 암석에 글을 기록하였다는 희귀 자료를 돌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역사탐방길에는 마침 방학을 맞이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남한산성 역사 탐방 길에 나선 모습을 볼 수 가 있다 정말 바람직한 일이란 생각을 한다. 요즘 아이들 내 자식 뉘 자식 할 것 없이 놀기 문화가 우선하는데 이렇게 쌀쌀한 날 역사 탐방 길에 나선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이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답게 보이던지 …….
 
남한산성 수어장대를 돌아보고 우리들은 다시 영춘 정을 돌아본다.영춘정은 순조 17년(1817) 광주유수 겸 수어사였던 심상 규가 지은 정자이다. 당시 광주유수였던 심상규는 1817년 정축년을 맞이하여 병자호란 당시를 회상하며 행궁의 상궐 왼편에도 좌승 당을 건립하고 편액을 '유차산루'라 하였다. 아마 이 때에 옥천정도 같이 건립되었다고 판단된다. 전해오고 있다.
 
 
 
심상규
소나무 기이한 바위 구름 속에 가려져 있어
천년세월 산신령의 가호를 받았구나.
훗날 한가로이 잠잘 곳 찾고자 하거든
시원한 가을 물결 이는 옥천정이 그곳이다
두실거사(심상규) 짓다
 
   
▲ 성곽길따라 일행들이 편안한 성곽길을 따라 진행을 하고 있다.
ⓒ 윤도균
성곽길

 
영춘 정을 돌아보고 우리들은 다니 남문(지하문) 방향으로 성곽을 따라 진행을 한다. 남문에 도착하니 남문의 위용이 대단하다 시간 관계상 아래까지 내려가서 남문에 대한 내력을 모두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며 제1남 옹성 방향으로 가는 성곽 길을 따라 가고 있다 그런데 제1남옹성은 남한산성 성곽 밖에 위치하고 있어 그 옛터만 성곽 너머로 바라 보일뿐 직접 밖으로 나가 확인이 곤란하여 그냥 위에서 조만만 하고 진행을 한다.
 
제1용성암문을 지나는데 성곽은 개보수를 하였는데 아직 성문은 예전 그대로인 상태로 빠른 보수공사가 필요할 것 같다. 우리들은 다시 제2옹성암문으로 향하는데 제 2옹성의 규모가 대단 다하다. 성곽은 높이만도 상당하고 그 축척된 옹성의 성곽이 지금까지 남한산성 관람 지역 중 가장 방대한 규모인 듯 하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남한산성도 식후경이라 제2옹성안 양지바른 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간다.
 
점시 식사를 마치고 제3옹성암문 방향으로 진행을 하는 역사탐방 구간은 아직 폐허된 산성 복원작업이 진행 중인 곳과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이제 부터는 평탄한 탐방 로가 아닌 다소 빡센 등산로길 을 따라 성곽을 끼고 오르게 된다. 다시 암문을 지나 동문 방향으로 진행하는 성곽은 보수 작업은 끝이 났는데 급경사로 이어지는 탐방 길로 바닥이 꽁꽁 얼어 얼음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자칫 방심하면 큰 피해를 볼 수 있는 이날 남한산성 역사탐방 구간중 가장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구간을 지나면 곧 동문 모습이 보인다.
 
동문 앞에서 전방 멀리 산 중턱에 망월사가 보인다. 이곳 남한산성의 사찰들에는 유달리 현대식 구조물 석탑이 그 높이를 자랑하며 건립이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인지 고풍스런 위엄이지 않고 조악한 구조물로 밖에 보이지를 않으니 ㅎㅎㅎ 아마도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남한산성내 9개 사찰중 가장 오래된 고찰로 망월 암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성을 정할 때 한양에 있었던 장의사를 허물고 그 불상과 금자 화엄경 한 벌, 금정 하나를 이리로 옮겨 창건하였다고 한다. 옛 망월사는 일제에 의하여 모두 소실되었고 4종의 복원된 건물의 규모가 옛터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대웅전, 금당, 요사체 2동, 13층 적멸보궁 탑과 병풍석은 망월사의 자랑이다. 망월사의 돌 축대는 옛 망월사의 규모와 건물의 배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게 한며 대형 맷돌이 유물로 보존되어 있다.
 
일행들 말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 은행 우체국 그리고 행정관청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난 처음엔 놀랐다 그런데 남한산성 성곽만도 10킬로가 넘는 대규모 산성인데 당연히 과거에도 남한산성 안에 민초들이 살았을 것이라 생각을 하며 그 이해를 하게 된다. 그런가하면 장경사신지옹성가는길 꼬불꼬불 성곽 길을 따라 가는 탐방 로는 우리들이 이날 산행을 나온 것인지 탐방 길을 나선 것인지 분별이 쉽지 않을 정도로 넘넘 편안한 길로 이어지고 있다.
 
남한산성 장경사 일주문을 지나 장경사를 돌아본다.
"장경사는 성내에 존재했던 9개의 사찰 중 당시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현존하는 유일한 사찰이며, 남한산성 동문 안에서 동북쪽으로 약 350m거리의 해발 36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망월봉의 남사면 중턱 곡저부이 완경사면을 이용하여 비교적 넓은 대지를 구축하였다. 이 사찰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사찰내의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남누(鎭南樓),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는데, 그중 대웅전이 가장 화려하게 지어진 고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의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측면의 칸은 정면의 칸보다 약간 좁아서 건물의 전체 평면은 장방 향을 이룬다. 건물의 정면에는 각 칸마다 4쪽 여닫이 교자 문을 달았다. 종무소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에 주심포식 4가가 모기둥을 썼다. 이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짧은 툇마루를 내었으며 2쪽 미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요사는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의 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이다. 산신각은 홑처마를 두른 맞배지붕 양식으로 좌우에는 밑이 둥근 바람막이를 하였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의 규모인데 정면 2칸에는 2쪽 여닫이 卍자문을 달았다. 현재 장경사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 남아 있다"
 
   
▲ 남한산성 성곽길 이곳 성곽길을 지난 구간은 등로가 편안하게 이어지고 있다.
ⓒ 윤도균
남한산성

 
장경사를 돌아본 후 이어지는 산행 길엔 장경사 신지옹성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 신지옹성은 남한산성 외곽에 설립된 옹성이 되어 이곳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는 암문을 통과하여야 돌아 볼 수 있어 우리들은 시간 관계상 신지옹성을 돌아보지 못하고 통과하여 동장대(터) 방향을 향하여 진행을 하다 남한산성군포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남한산성 탐방 길에는 의외로 이렇게 군포지가 여러 곳에 있어 만나게 된다.
 
봉암성도 잠시 돌아보고 우리들은 동장대 문을 통과하여 성곽 밖으로 나와 벌 봉을 향하여 간다. 유일하게 벌 봉에는 뾰족하게 솟은 암봉이 있다 우리들은 전원 암봉에 올라 그곳에서 남한산성 일대와 그리고 성곽 밖 일대를 돌아보며 기념사진도 찍고 벌 봉에 대한 유래도 각별히 새겨두고 다시 동장대문을 향하여 원점회귀 한다. 동장대 지나 이어지는 이곳 성곽 길은 탐방 길이 아주 험하기 이를 때 없다 일행들 조심조심 구간을 지나며 몇 곳의 군포지도 지나고 정성으로 쌓은 5.m정도의 소원 탑도 만나고 북문 (전 승문)도 지나고 나니 드디어 이날 남한산성 역사탐방 산행 길 그 종착지인 연주옹성이 멀리 조망 된다.
 
암문지역을 통과 하는 것을 마감으로 이날 남한산성 이어가기 역사탐방 산행길이 모두 끝이 나고 시간을 보니 오후 3시 20분이다 우리들은 이곳에서 서문 방향으로 이어지는 외곽 성곽을 따라가다 쌍바위 약수터 방향으로 서둘러 하산을 하는데…….전에도 언급을 했지만 남한산성 이어가기 종주라 하여 쉽게 생각하였다가는 큰 코 다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려 장장 10km가 넘는 코스에 고도 500미터를 넘나드는 남한산성 역사 탐방 길은 결코 그렇게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았다.
 
힘든 남한산성 역사 탐방 길을 마치고 하산을 하는 이곳 쌍바위약수터 하산 구간은 본래 있던 등산로는 수년의 세월동안 사람들이 다니고 여름철 장마철이면 사람들이 다니 등로가 마치 수로가 된듯 빗물이 흘러 내려 마치 작은 계곡을 방불케 패이고 험해져 이제는 이 기존 등로는 마치 군인들 작전용 교통호처럼 되어 버리고 새로 등산로 보수를 하면서 만들어놓은 난간 길을 이용하게 되어 조금은 하산길이 가파르게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하산을 하는데 늘 귀가길이 바쁜 나는 일행들 보다 먼저 뛰어 내려와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침 할아버지 산행을 떠날 때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손자넘 도영 이에게서 전화가 온다 할아버지 언제 오세요. 보고 싶어요. 하면서…….그러니 꼼짝없이 내 빈자리 지키고 있던 도영이 할머니에게 도영 이와 뭐 맛있는 것 저녁으로 시켜 먹으라. 말을 전하니 이넘 흥이나 서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소리를 연발하며 전화를 끈는다.도영아 !개구쟁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