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단하고 힘드신가요?

2008. 6. 26. 11:46☎사람사는이야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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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 전쟁일 입니다.
6.25 전쟁 58돌입니다.
형제,자매,어머니,아버지들...
내 손으로 총을 겨누고 죽여야 했던
기막힌 시대를 지나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잠잘 곳 하나없고 입을것 없고 먹을것이 없어
거리를 헤매이며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반세기를 넘은 지금에는
세계에서 가장 우뚝 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민족이 되었습니다.

삶이 고단하고 힘드십니까.
아래사진과 글을 보시고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왜 어머니의 팔은 아이를 품어줄 수 없는 것일까요?
왜 어린 소녀는 힘겹게 누군가를 업고 있는 것일까요?

1969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서 있는 어머니 젖을
누나 등에 업힌 채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
어머니는 손에 밴 비린내 때문에
아이를 안지 못 하고 있다.





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이 순간, 손을 내밀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뒤에 있는 간판과 대비된다.





삶을 응시하는 자들이 키워가는
세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고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질서와 안정감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글픕니다.

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거리의 부녀를 눈여겨보세요.

1963년 부산.
손으로 소음을 막아주고,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잡아주며
아버지는 딸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육신의 한 부분을 미리 자연 속으로 돌려보낸
사람들의 삶도 도무지 가벼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어른들 세계로 팔을 쭉 뻗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빛을 향해 발돋움하겠지요.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 원문출처 : 빛과 은혜는 이웃과 함께 -

 








    잊으서는 안되는 6.25 전쟁

      글: 靜 派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간 계속된 민족상잔의 6.25 전쟁은 허약하고 빈약한 사회적 기반마저 송두리쩨 무너뜨린 대 재앙이었다. 민족 지도자 조 만식 선생을 살해케하는 등 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을 죽이거나 탄압하고 광복이 되어 통일된 정부를 세우려는 의도를 결정적으로 허물어 버린 민족의 반역자 김일성 집단!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서해안의 옹진반도로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역에 걸쳐 국군의 방어진지에 맹렬한 포화를 집중시키면서 기습공격을 개시하였다. 적의 YAK전투기는 서울 상공에 침입하여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시가에 기총소사를 하였다. 당시 국군은 노동절(5월 1일), 국회의원 선거(5월 30일), 북한의 평화공세 등 일련의 주요사태를 전후하여 오랫동안 비상근무를 계속하여 왔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태세가 이완된 상태였다. 특히 북한의 평화공세에 대비하여 하달되었던 비상경계령이 6월 23일 24시를 기해 해제되어 병력의 1/3 이상이 외출 중인 상태에서 기습공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7개 보병사단, 1개 기갑사단, 수개의 특수 독립연대로 구성된 총병력 11만 1000명과 1,610문의 각종 포, 그리고 280여 대의 전차 및 자주포 등을 제일선에 동시에 투입하였다. 적 제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일제히 남진하였다.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1·6사단은 제105전차여단의 제203전차연대와 제206기계화연대의 지원하에 개성에서 서울로 공격하고, 주공부대인 북한군 제3·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은 각각 연천·철원 일대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공격해 왔다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수립 이전인 1946년 9월 서울에서의 철도파업, 10월 대구폭동, 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 10월 20일 여순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덧붙여 1948년 11월 17일 오대산 부근으로의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세력에 의한 전복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최종적인 수단으로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에와서 격변을 겪지 못한 젊은 세대들, 특히 운동권 연대들은 전교조 집단의 의식화에 현혹이 되어 북침이라 우기는 하면 김 정일의 호전적 적화야욕을 깨닫지 못하고 반미 운동에 혈안이 되어 촛불 시위를 통해 반미구호를 내 세우며 난동으로 공공기물을 파괴하는가 하면 한달을 넘게 어린 학생들 앞세우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헛된구호를 국민의 이름으로라 왜곡하며 외쳐 되고 있는것이다. 근대 국가가 형성된 이래 지난 500년간에 모든 전쟁 중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쟁이였음을 젊은이들에게 바르게 알려 주고 싶은것이다. 58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은 호전성을 버리지 않고 수없이 지원해 주었던 현금과 물자들을 전쟁 준비에 사용하고 있는것이다. 죽을때 까지도 그 죄를 회게하지 않고 세습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그들이 걸핏하면 민족이라는 이름을 외치며 인민의 배고픔을 도외시하고 있다. 배고파 탈북하는 수 십만의 인민인 탈북자들을 잡아다가 극형으로 위협하는 실정을 고발하고저 하고 이에 동조하는 우리나라반체제 집단에 응분의 조처를 내려 혼란과 분열의 책동을 막아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