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2. 17:57ㆍ☎훈훈한美談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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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사투리 LESSON #8-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 - 장대희 선생님
율곡(栗谷) 이이(李珥) 유적
강원도 강릉 출생.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이며, 어머니는 현모양처의 사표로 추앙받는 사임당신씨(師任堂申氏)이다.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했는데,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産室)은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파주 이이 유적
파주 이이 유적에는 선생과 신사임당을 비롯한 11기의 가족묘와 율곡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 자운서원의 건립 이력을 기록한 ‘자운서원 묘정비’, 율곡 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이이 선생 신도비’ 그리고 율곡 선생의 유품 및 일대기를 전시한 율곡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1973년 자운서원, 이이 선생묘, 신사임당 묘가 각각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8년 자운서원묘정비가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2월 율곡 선생관련 유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는 장소성이 인정되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되었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다음 백과 참조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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