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악연 버리고 용서하려 한다. 국민 여러분 용서해달라"

2016. 4. 5. 12:55☎사람사는이야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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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악연 버리고 용서하려 한다. 국민 여러분 용서해달라"

 

<김종필 증언록> 출판기념회가 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머지않아 내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 지난 날의 악연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아니게 고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린 것도 적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해 주실 것을 빕니다.

 

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90세 노()정객의 연설에 청중들은 숙연해졌다.

여성지지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다.

 

김종필 전 총리(JP)10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김종필 증언록출판기념회에서 그렇게 '거인'의 퇴장을 스스로 선언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그간의 소회를 원고에 적어 25분간 읽어내려갔다.

그는 증언록에 대해 그간 잘못 알려졌거나 왜곡된 일부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았다는데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반세기 전 혁명으로 세상을 뒤엎었던 역사적 빚을 갚았다는 홀가분한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이 나라 정치는 한 시대가 저문 것 같다. 제 주변 전우들은 거의 다 세상을 하직하고 개발시대 정치인 중 나 한사람 남아있다아마 정치에 대해 한 말씀 하라고 아직

남겨준 것 같다고 퇴장사를 시작했다.

 

그가 현실정치에 던진 마지막 조언은 공자가 남긴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악함이나 못된 마음이 없어야 한다)’였다.

 

김 전 총리는 우리 정치가 목전에 닥친 선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갖가지 산재한 국가적 어려움을 소홀히 다루는 것같아 안타깝다.

 

정치가 국민의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데, 오히려 국민들이 정치를 더 걱정하고 있다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본래 기능을 하지 못해 정치 똑바로 하라는 국민들의) 소리가 제 귀에도 들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가관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관이 나올 수 없다.

 

국가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려 한다거나 대통령 되는 꿈만 꿔서는 어떻게 되겠느냐"국민과 국가의 영생을 바란다면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놔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분들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를 나누는 기회는 앞으론 없지 않나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다""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께 엎드려 감사 드린다"고 맺었다.

 

마지막 대중연설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온 김 전 총리에게 지지자들은 몰려들었다. 그러곤 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출판기념회에는 김 전 총리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듣기위해 정계·재계·문화예술계 등 1000여명의 인사가 참석했다.

김 전 총리와 친교를 맺어온 나카소네 야스히로(98·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는 와타나베 히데오(渡邊秀央) 일한협력위원회 회장대행을 보내 축사를 전했다.

 

홍석현 중앙일보·JTBC 회장은 축사에서 많은 회고록이 민감하고 미묘한 문제를 피해가느라 평범하고 한가했지만 JP는 우회하지 않았다.

 

격동의 순간을 솔직하고 실감나게 증언해 과거 어떤 회고담보다 현장성이 뛰어났다고 말했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정치는 허업(虛業)'이라는 김 전 총리의 발언을 인용해 "권력의 정점부터 역경의 세월을겪은 후 세상만사 이치를 터득해 이른 심오한 결론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전문.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작년 5월 이 자리에서 화보 출판 기념회를 가졌는데 꼭 열 달만에 현대사 증언록을 책자로 해서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저자 서문에 썼습니다만 이 책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한 시대의 증언이 되었다. 5·16 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헌정에 참여해온 저로서는 그 시대, 그 현장, 그대로를 증언하는 그 이상으로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저를 알아주시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비록 반신불수의 육신이 되었지만은 다행히 하느님께서 제 기억력을 어지간히 남겨주셔서, 길다면 긴 40여년 정치 역정의 주요 대목을 그럭저럭 되짚을 수 있었습니다.

 

열정적인 인터뷰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발굴하기 위해서 애써주신 중앙일보 회장님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도와주신 몇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작년 1, 중앙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저의 현대사 증언 '소이부답'은 나름대로 몇 가지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잘못 알려졌거나 왜곡된 일부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았다는 점이 그 첫째입니다. 또 개인적으론 반세기 전 혁명으로 세상을 뒤엎었는데, 그런 역사적인 빚을 갚았다는 점에서 홀가분한 기분도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번영과 민주주의는 그 혁명의 성공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증명할 수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발전에는 도전과 응전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대를 관통하는 그 시대의 논리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의 논리가 있고, 오늘은 또 오늘의 논리 위에서 성장하는 것이 역사입니다. 흔히 오늘의 잣대로 과거사를 재단하는 버릇이 좀 있습니다만은, 사려깊지 못한 생각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제의 한, 도전, 이런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오늘의 모든 희망과 정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사 앞에서는 경건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또 역사 발전에 있어서는 온고지신이라는 교훈이 필요합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제가 현대사 증언에 임했다는 점을 간단하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여야할 일이 있다면, 이런 출판된 이 증언록이 우리나라 현대사를 이으는데

 

작은 도움이나마 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박수) 오늘 이 자리에 우리 나라의 고위 지도층에 계신분들이 많이 참석해 주셨습니다.

 

또 금은과 같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특히 지금 매우 분주한 때인데도 이렇게 오신 것에 대해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지난 시대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서 몇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을, 그런 점으로 참작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이 공감하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 나라 정치는 한 시대가 저문 것 같습니다. 개발시대 정치인 중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이 아마 제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듭니다. 우리 정치에 대해서 한말씀 하라고 아직 남겨둔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 전우들이 거의 다 세상을 하직해서 저 한사람 남아있는 것이 한 말씀 남기고 가라아직 남겨둔 뜻이 그런 데 있지 않나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많은 상념이 오갑니다만은 오늘의 이 시대는 참으로 엄중한 시대입니다.

 

세계 경제의 침체로 수출이 줄고 기업과 민생이 어렵습니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 그리고 대륙간탄도유도탄 발사,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안보위기가 더욱 가중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정치인 같은 분들이, 정부에 현명한 대책을 촉구하고 국민의 인내와 단합을 이끄는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박수)

그러나 우리 정치가 목전에 닥친 선거때문인지, 그런 이유가 있어서인지 갖가지 산재한 국가적 어려움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정치가 국민의 안녕을 생각해 국민이 정치를 염려하는, 그 염려를 덜어줘야만 할텐데, 정치인들이 국민을 걱정하는 것보다는 국민들이 정치를 더 걱정하고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가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국민들은 안타깝게 생각들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정치 똑바로 해라, 하는 소리가 저의 귀에까지 들립니다.

우리 정치, 좀 더 슬기롭게 본연의 기능을 찾아서 밀고 끌고 왕성한 보조를 맞춰서 전진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수)

정치의 목표가, 잘 아시는 일입니다만 무엇입니까. 정치인은 무엇보다 먼저 철저한 국가관을 몸에 지니고, 뇌와 가슴에 다져넣고, 나라와 국민을 모든 가치의 최상에 올려놓고 이끌어야하겠습니다. 국가관이 없이는 올바른 정치관이 나올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철저한 국가관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하는, 한나라의 대통령 꿈만 꾸고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어지럽히는 헛된 꿈은 접어야합니다. 사무사(思無邪, 생각에 사악한 게 없다는 뜻)입니다.

모름지기 정치인은 한결같이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생각해야 하며 사심은 버리고, 문자 그대로 생각하는 것은 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봉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박수)

국민과 국가의 영생을 바란다면 작은 당리당략은 뒷전에 놔야할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 정치생명을 걸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했던 이유 또한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한 이상 아닌 이상을 호소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모든 선진국이 지금 지구상의 선진국들은 모두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우리보다 앞지른 희망을 가지고 달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라고 해서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제도를 버려야 국회가 바로 민의를 살펴서 똑바로 설 수 있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박수)

우리가 비록 이루지 못한 일이지만 나라장래를 걱정하는 국가관에 투철한 후진 정치인들이 반드시 계승해서 이뤄주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나이 아흔을, 구순 또는 조수라고 합니다.

인생을 졸업한다는 뜻이겠지요. 옛 선현의 말씀에 인명은 재천이요, 공수래공수거라 했습니다.

 

그동안 구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애증과 회한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머지않아 내 육신마저 버리고 떠나야 할 시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악연도 깨끗이 잊어버리고 용서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한생의 업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본의아니게 고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린 것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를 해 주실 것을 비는 바입니다.

오늘 저는 많은 분들, 한자리에서 뵙고 인사를 나누고 하는 기회는 이제 앞으로는 없지 않나 생각하고 섭섭한 마음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고난을 감내하며 조국 발전에 땀 흘리며 함께 해주신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그리고 저희 생애동안 항상 동행해주시며 힘을 보태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조국, 대한민국의 번영과 무구한 번영과 융성을 기원하면서 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박정희 삶·진실에 가장 근접한 JP
솔직·발랄…회고록 새 지평 열어
“민주주의는 피 아닌 빵 먹고 자란다”
사실 바로잡고 현대사 빈 공간 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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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
김종필 지음
중앙일보 김종필증언록팀 엮음
와이즈베리
1 권 530쪽, 2권 436쪽
각 권 2만5000원

2015년 3월부터 10개월간 중앙일보에 연재된 『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총 962쪽. 두 권의 아름다운 장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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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2월 서울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열린 송년파티에서 박정희(앞줄 왼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재건복을 입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1961년 5·16에서 2004년 4·15총선까지 43년간 김종필(JP·90) 전 국무총리는 한국 역사의 무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약한 주인공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면서 권력과 세상의 원리를 관찰해왔다. 박정희와 3김시대를 관통하는 최후의 증언이다.

미국의 존 F.케네디는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신화”라고 했다. 진실은 거짓 보다 신화에 무너지기 쉽다는 얘기일 것이다. 김종필의 증언록은 부정확한 오류와 의도적 왜곡, 과장된 비난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잿빛으로 색칠한 어둠의 신화와 대결했다.

그는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전개를 믿었다. 인간성의 명암을 골고루 드러내되 밝음은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배우고 어둠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자는 따뜻한 역사관이 증언록을 흐른다.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은 5·16 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나라를 일으키려면 근대화 밑천이 필요하다. 밑천이 나올 수 있는 곳은 대일 청구권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케다(池田) 일본 총리와 비밀 회동을 하면서 실마리를 풀었다.

JP는 “한일회담은 내겐 제2의 혁명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일. 그 일을 수행하는 게 혁명의 기획자였던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고 말한다. 굴욕외교론이 온 나라를 뒤덮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하야 압력까지 나오자 그는 실권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했다.

JP는 그 때 한국의 현실을 “민주주의는 피를 먹기 보다 빵을 먹고 자란다. 민주화는 배고픈 사회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빈곤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JP는 5·16 거사 뒤 박 대통령과 숱한 대화 속에서 한국의 발전 모델이 조국 근대화→민주화→복지화로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나눴다. 이런 ‘선(先)산업화 후(後)민주화’ 발전 전략이 한국을 전후 신흥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으로 올려놓은 원동력이었다.

 그의 증언에는 통념과 속설을 깨는 파격들이 널려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삶과 진실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들이다. 혁명의 대의(大義)엔 인간의 아픔이 녹아있고, 철권통치자에게도 권력을 멀리하려는 속성이 있다.

JP는 ‘5·16 혁명공약’ 5개항을 자신이 직접 작성했음을 증언록에서 처음으로 밝혔다. 그 1항에서 JP는 ‘반공을 국시로 한다’고 썼는데 이는 박정희의 좌익전력 콤플렉스를 지우고 싶어서였다고 고백했다.

박정희가 JP가 작성한 혁명공약에 제6항을 추가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제6항은 ‘군부는 과업이 성취되면 원대복귀한다’는 내용인데 이처럼 박 대통령은 60년대 중후반까지 집권의지가 약했고 권력 근처에서 머뭇거리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다.

 ‘황태성은 밀사가 아니라 간첩’‘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증발’‘박정희의 이승만 환국추진’‘차지철 경호실장 임명은 육영수의 유작’등 역사를 고쳐 써야할 증언들이 수두룩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급작스런 죽음으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다. JP는 박정희가 못 쓴 그 시대의 민감한 기록을 『김종필 증언록』에 남김으로써 1960~70년대 한국사의 비어있는 중심을 메웠다.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 JP가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을 집권에 이르도록 도와 준 과정은 역사의 순환과 해원(解寃)을 생각케 한다. 한국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난 1997년 DJP후보단일화 때 JP는 김대중 후보에게 “당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받은 박해를 내가 보상해주겠다”며 양보했다. JP는 대신 DJ로부터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보답으로 받아 역사에서 두 적대 세력의 화해를 추구했다.

『김종필 증언록』은 회고록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회고록은 공식적 기록들을 위주로 작성됐고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 투쟁에 초점을 맞춰 구성됐다. 국가 지도자 내면의 고뇌와 역사 주역들의 가감없는 인간성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JP의 현대사 증언은 과거 회고록들의 미흡함을 뛰어 넘는다. 깊고 풍부하고 솔직하고 발랄하다. JP의 성격이 반영됐다.

[S BOX] 14개월간 JP 인터뷰…문서·자료만 1t 트럭 3대 분량

2014년 10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14개월 간 중앙일보의 ‘김종필증언록팀’은 JP의 현대사 기억을 채취했다. 매주 토요일 서울 신당동 JP의 자택에서 2시간 가량 정기적인 인터뷰 외에 주중에도 수시로 증언을 채록했다.

그 결과 100여 시간 분량의 인터뷰 동영상과 A4 용지 2000쪽 가량의 녹취록이 축적됐다. 구순(九旬) JP의 기억은 생생했고 목소리는 정정했다. JP의 구술 내용은 2015년 3월부터 중앙일보를 통해 매주 월·수·금 2개면에 걸쳐 세상에 공개됐다. 연재 회수 총 114회.

JP는 인터뷰에 응할 때 미리 전달받은 그날의 주제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고 당시 상황을 거침없이 회상했다. 신당동 자택의 서재와 창고 등에 쌓인 1톤 트럭 3대 분량의 각종 문서와 자료들이 동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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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간 JP를 보좌해 온 김상윤·이덕주 특보도 처음 듣는 내용들이 쏟아졌다. 중앙일보 증언록팀은 박보균 대기자와 전영기 논설위원, 최준호·한애란 기자로 구성됐다. 이들은 JP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시대적 기록들과 생존한 주요 관계자들의 증언도 청취했다.

JP는 오랫동안 “회고록이 역사 속에서 개인을 미화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며 집필을 거절했으나 “후세를 위해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중앙일보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신 연재와 출간이 회고록 보다 증언록 성격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그래서 나온 중앙일보 연재물 제목이 “김종필증언록-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고 출간된 책 제목도 『김종필 증언록』이 되었다.


[출처: 중앙일보] [책 속으로] 박정희·3김시대 관통한 최후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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