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4. 17:58ㆍ☎파평윤씨네사랑방☎
고려태사공 파평윤씨 시종 '윤신달' 추향제
봉강재 (鳳岡齋) 유래
파평 윤씨 시조인 윤신달(893∼973)의 묘를 관리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고 장성한 뒤에는 고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건물은 영조 28년(1752) 그의 28대손인 윤광소가 안동부 사로 재임할 때 세운 것으로, 10년 뒤인 영조 38년(1762) 26대손인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보수하고 안동 부사였던 유성대가 땅을 넓히고 고쳐 지었다. 앞면 6칸·옆면 4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전체적으로 ㄱ자형 평면구조로 나무를 다듬고 짜 맞춘 기법이 우수하며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자료 201> 참조
시조 태사공 휘신달 약사 (始祖太師 公 諱 莘達 略史)
우리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라(新羅)의 천 년 사직(千年社稷)이 붕괴(崩壞)하고 후삼국(後三國)의 혼란기(混亂期)를 거쳐 이 나라가 재통일(再統一)되는 역사적(歷史的)인 일대 번역기에 탄강(誕降)하시어 마침내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위인(偉人)이시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신라(新羅) 경명왕(景明王) 2년(918)에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등 동료(同僚)들과 협력(協力)하여 궁예(弓裔)를 무찌르고 왕건(王建)을 국왕(國王)으로 추대(推戴)하여 백성(百姓)의 호응(呼應)을 얻으니 이로써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수립되었던 것이다.
그 공훈으로 (王建) 태조(太祖)로부터 “태사공(太師公)께서는 2등 공신(二等功臣)으로 벽상삼한익찬공신(壁上三韓翊贊功臣”)의 공호(功號)와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라는 관작(官爵)을 받으셨다. 태사(太師)라는 관작(官爵)은 태부(太傳) 퇴보(太保)와 더불어 3공(三公)의 예후(禮遇)를 받는 직위(職位)였다.
공(公)의 휘(諱)는 신달(莘達)이요 일휘(一諱)는 협심이시며 시호(諡號)는 소양(昭襄)이시다. 신라(新羅)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893) 계축(癸丑) 음력(陰曆) 8월15일 파주(坡州) 파평산(坡平山) 아래 용연(龍淵)에서 탄강(誕降)하시었다.
공(公)께서 파평산(坡平山)과 용연(龍淵) 부근에서 성장하심에 따라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니시게 되고 재기(才器)가 뛰어나시어 날로 영특한 자품(姿品)을 갖추시게 되었다. 공(公)께서는 자라나시면서 학문(學問)을 익히시고 또 파평산(坡平山)에 올라가 무술(武術)을 연마하신 후 성년(成年)이 되시면서 어느 재상댁(宰相宅)에 문객(門客)으로 계시게 되었다.
그 때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게 되었는데 나라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로 결정하고 국왕(國王)으로부터 그 재상(宰相)에게 제문(祭文)을 지으라는 왕명(王命)이 내려졌다. 그 재상(宰相)이 자택(自宅)에 돌아와서 제문(祭文)을 지으려 하였으나 머리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에 태사공(太師公)께서 『이렇게 지으시면 어떠하리까?』
하시면서 의군신지유죄감수재앙(宜君臣之有罪甘受災殃) 해초목지무지등몽초열(奚草木之無知等蒙焦熱)이라고 써서 재상(宰相)에게 제시하시자 재상(宰相)은 그 글귀를 보고 과연 명문(名文)이라고 칭찬하시면서 제문(祭文)을 지어 국왕(國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 글 뜻은 『임금과 신하가 죄가 있다면 마땅히 재앙을 달게 받겠지만 어찌 무지한 초목까지 타 마르게 하나이까』라는 내용이었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그 재상(宰相)의 추천으로 여러 관직(官職)에 오르시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자세한 문헌(文獻)은 없다. 그후 태사공(太師公)의 묘소(墓所)가 실전되었다가 여러 百年이 지나서 찾았는데 그 지방민(地方民)들로부터 그곳은 윤능골(尹陵谷)이라고 전해 온다는 말을 들은 것이 단서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라(新羅) 유민(遺民)들이 태사공(太師公)의 덕치(德治)에 감동되어 마치 왕과 같이 섬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사공(太師公)께서는 서거하실 때까지 동경(東京)에 머무시어 30년 동안이나 신라(新羅) 유민(遺民)을 선치(善治)하여 완전하게 고려에 충성스러운 백성(百姓)으로 감화시켰기 때문에 공(公)이 서거하신지 10년 후인 성종(成宗) 2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는 폐지되고 각 군은 그 고을 수령(守令)에게 맡기고 경주(慶州) 일개군(一個郡) 만 다스리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두도록 직제를 개정하였던 것이다. 중략 <파평윤씨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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