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들과 함게 어린시절 추억 그리며 오른 고향 뒷동산 [사진,동영상]

2009. 1. 18. 23:44☎갈현10회동창회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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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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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나에겐 고향이 둘이나 된다. 그 하나는 내가 태어나 7살까지 자라다 6.25사변으로 인하여 피난을 나오기 전까지 살았던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마산리 용산동이 내가 태어난 태생의 고향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내가 7살때 엄마 아버지 손 잡고 피난을 나온곳이 나의 외가댁이 살고 계셨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1리 약산골이 청파에게 제 2의 고향이다. 

 

6.25 사변으로 인하여 피난을 나올 당시 우리 부모님들께서는 전쟁이 끝나고 안정이 될때까지 피난처에서 살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 가신다는 생각을하고 정착을 하셨는데 부모님 슬하에 7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끓고 다시 고향이라고 찿아 가보셔도 당시 우리집 환경이 내 농토 한 마지기 없이 오직 종중땅 천수답 몇 마지기에 의존하며 살아야 했던 우리 부모님 실정에서는 막상 고향이라고 다시 찿아 가신다고 해도

 

우리가 살던 파평면이란곳이 논 농사는 얼마 안되고 대부분 손 바닥만한 밭뙤기 얼마에 농사라고는 보리심고 콩심고 하는 정도셨으 막상 막연하게 전쟁으로 인하여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찿아 가 보셔야 그 많은 어린 새끼들 연명하기가 쉽지 않을것을 예상하신 우리 부모님께서는 비록 피난처에 내 농토는 한 마지기는 없으셨지만  논 농사가 주농인 피난처 마을에서 당시에는 젊으셨던 우리 부모님께서 열심히 노력만 하시면

 

피난나오기 전에 살던 고향보다는 오히려 많은 가족들 부양이 낳을것이란 판단을 하시어 함께 피난을 나왔던 이웃들은 모두다 전쟁이 끝나고 수복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셨지만 우리 부모님은 피난처인 처가댁 마을에 그대로 주저앉아 자리를 잡고 살게 되셨다 당시 우리 아버지께서는 유달리 손재주가 좋으셨서 가을철이면 집집마다 거의 선수로 뽑혀 다니시며 지붕 이으는 일을 도 맡아 하셨고

 

여름철이면 피난나오기전 사시던 고향마을 뒷산에서 싸리나무 채취 하셔다 소쿠리 종댕이 광주리 등등 싸리 공예를 하시어 그 물건을 인기리에 판매를 하셨고 짚 공예로 멍석 맷방석 등등 아버지의 손이 가는 공예품을 우리마을에서 그 누구도 그 작품을 따라 모방을 하기 힘들 정도로 우리 아버지의 손재주가 좋으셨고 저녁이면 희미한 등잔불 아래 우리 아버님이 낭낭하게 읽어 내려 가시던 "심청전 장화홍련전"그리고 역사책을 읽으시는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어린시절 눔물을 많이 흘렸었는데 나는 지금도 우리 아버님의 그 낭낭하시 책 읽는 소리가 귀가를 맴도는 착각을 일게 할 정도이다 그렇게 우리 아버님은 비록 피난생활을 하는 피난민이셨지만 당시 120여호나 사는 약산골에서 우리 아버지를 원주민 그 누구도 무시 하지 못하시었고 그런 우리 부모님을 마을 분들이 웬만하면 도움을 주려 애를 쓰셨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는 침까지 놓으실 줄 알아서

 

밤중에도 누구네 집에서 배가 아프다 어디가 아프다 하면 우리 아버지를 불르러 와서 아버지는 그 야심한 밤에 가서 침을 놓아 주시고 개쓸개를 따뜻한 물에 타서 먹이면 신기할 정도로 병이 나아 그 시절 마을에서 개를 잡으면 동네 사람들이 그 개쓸개는 누가 가져오라지 않아도 가져다 주어 마을에 상비약으로 쓰실 정도였다.그렇게 유능하신 아버지 그늘에 자란 자식이다 보니

 

비록 피난을 나와 사는 피난민 자식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형제들은 제2의 고향인 마을에서 괄시받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버지의 그늘이 그렇게 높고 넓고 컸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그래서 나에에게는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고향이 둘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내가 7살때 피난을 나왔을 당시 물론 키도 유달리 작기도 하였지만 전쟁의로 인하여 부모님께서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하신 상황이되어

 

나는 요즘 아이들 취학 시기와는 달리 9살이나 되어 국민학교엘 들어가 전쟁으로 인하여 거의 폐허에 가까운 학교 운동장에서 교실이 부족하여 미군용 천막을 운동장에 치고 그 안에서 푹푹찌는 무더운 여름철에도 공부를 하였는가 하면 여름철이면 학교 인근에 있는 밤나무 숲에 칠판을 걸고 공부를 하는 과정을 겪다가 겨울철이되면 이것 마져도 여의치않아 오전반 오후반으로 반을 나누어 다른 학년이 공부한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하는 과정의 학교를 다녀야 했다

 

당시 우리들이 공부를 하던 교실 지붕이 양철지붕이었었는데 이 양철지붕이 삭아 여름철 장마철이면 지붕이 새 물이떨어져 교실 바닥에 바켓츠를 대 놓고 똑똑 떨어지는 낙수물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해야 하는 환경이었다 그러다 가을철이면 갈현리 성동리 약산골 징구지 갯말에 거주하시는 학부모님들이 집집마다 볏짚으로 엮은 영을 한 마름씩 학교에 가지고 오셔서 학교 지붕을 볏집으로 이으시고

 

유리창이 있었던 창문은 전쟁으로 인하여 모두 깨어져버려 가을이 되면 그 유리창이 끼어있던 창문에 창호지를 바르고 교실에는 달랑 교탁하나에 개인별 책상이 없어 전쟁으로 인한 탄약을 담았던 나무 괘짝으로 책상을 만들어 교실 맨바닥에 앉아 공부를 하여야 했다.그러다 고약한 선생님을 만나 벌을 설때면 으례껏 책상을 머리위에 들고 벌을 받는 그런 환경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다녔던 갈현 국민학교는 대부분 피난민 학생들이 많아 점심 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미국정부에서 FDA구호양곡으로 기증한  우유가루에 안남미쌀을 넣고 우유죽을 쑤어 그것을 미군 변또에 받아 점심으로 때우곤 했는데 그런데 그때 왜 그리도 우유가루 죽이 맛이 있던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유난히 키가 작아 다른 아이들 보다 더 안타까워 보였던지 그때 우리반을 가르치셨던 여선생님께서 특별히 우유죽을 더 주셔서 맛있게 먹었던 추억이.... 

 

그런데 내가 제 2의 고향으로 정들여 살았던 우리 마을 약산골이 파주땅에서는 거의 오지마을에 해당될 정도로 문명의 혜택이 쉽지 않았던 마을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내가살던 고향마을 앞으로 자유로가 생기고 오두산 전망대가 생기고 국가대표 축구 트레이닝쎈타가 들어서고 고려박물관이 들어서고 경기도 영어마을 그리고 예술인촌 헤이리마을까지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내가 살던 전원마을 약산골은

 

완전히 아파트단지에 빌라촌 그리고 최근에는 콘도미니엄 시설과 각종 위락시설까지 들어서는 역사의 변천과정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초등학교 1학년때 만나 6학년 졸업을 할때까지 함께 학교를 다녔던 초딩들과 함게 앞으로 조금더 세월이 흐르면 내가 자라고 성장한 고향마을 그 모습까지도 머리속에 그림으로 그리기 쉽지 않을 제2의 고향마을 뒷동산(검단산 약산)을 어린시절 동무들과 함께 올라 그때 그 시절 추억을 기리는 추억 산행을 다녀왔다.

 

그 어린시절 땅 삘기 뽑아 먹어 입이 시퍼래 져가지고 서로 마주보며 낄낄대고 웃어대던 추억 그런가 하면 장능에서 송기를 꺾어 먹으며 굶주리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오랫만에 초딩들과 함께 어린시절 우리들이 자고 새면 학교를 가기 위하여 아니면 나무를 하기 위하여 오르내렸던 그 약산 검단산을 거닐며 가다가 서서 서로 가르치는 방향의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 하며 배꼽을 잡고 낄낄 거리면서 말이다.

 

그때 우리들은 완전히 초근목피(草根木皮) 생활을 실 체험으로 겪으며 어린 시절을 자랐다 아마 그래서 내가 오늘날 겨우 160cm란 작은키로 자란것이 한창 어릴때 제대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여 그런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일면에서 생각하면 그때 그시절 초근목피 생활이 요즘 건강문화 차원에서 본다면 완전히 자연산 생식을 한 것으로 아마 그래서 그때 그 힘이 오늘날의 건강한 나를 있게 한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한다.

 

 

법화전

 

어린시절 작골의 법흥사 절로 소풍을 다녔던 사찰인데 지금은 본전만 그대로이고 주위에 요사체들은 모두 새로 건축이 되고 있다 그때 어린시절 보기에 이 본당 대웅전이 얼마나 크게 보였었는데 오늘 다시 돌아보니 너무도 외소하고 작게만 보인다.

 



 


무량수전 / 새로 건축이 되었다.
 


느티나무는 60년전이나 지금이나 크기가 그대로

인듯하고 느티나무아래 우물은 물이 마르고....
 



 


새로지은 무량수전은 온통 한글로 현판도 써있고 주련도 모두 한글이다
 



 



 



 



 



 



 


그 옛날엔 멀리 보이는 한강이 겨울철이면 집터미만한 성애장이 가득히 밀물썰물에 밀려 다녔는데 지금은 아주 작은 성애장 몇 장이 밀물 썰물에 오르내리고 있을뿐이다 아마도 공해로 인하여 얼음이 어리 않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이든다.
 



 



 


절 뒷동산(검단산)을 개발당시 홀라당 까놓아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소원탑
 



 



 

 



 



 



 


고려박물관

 



 



 

 

이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내가 살던 고래마을이과 농경지였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고래에 위치한 회공장 산이었는데....
 


멀리 우뚝솟은 봉우리가 봉우뚝이다 어린 시절엔 그렇게나 높은 산이었는데....
 


내가 살던 고래 뒷동산이 오솔길로 변하여 산책로가 조성이 되어있다.
 



 


고래 돌산
 


이 평지가 그 옛날 우리 밭 자리였는데 개발되기전 그 밭은 100원에 우리가 팔았다.그런데 그 밭은 산 사람은 1억도 더 보상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ㅎㅎㅎ 하지만 100원에 팔았어도 오늘날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 그것이 더 복이 아니겠는가?
 

 


 



 


고래 뒷산을 오르고 있는 일행들
 



 



 



 


풀섶을 밟고 오르는 촉감이 마치 양탄자 위를 걷는 기분이다.
 



 



 



 



  


그 옛날 어려서 이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고 나무를 하고 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