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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호] 강원도 양구, 화천의 사명산... 입산 통제로 "평화의 댐 제4땅굴" 안보 견학을 하다

윤도균 2021. 4. 2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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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fKkdCEF4NG4

강원도 양구, 화천의 사명산... 입산 통제로 "평화의 댐 제4땅굴" 안보 견학을 하다

 

늦가을 비가 내리고 나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오늘은 강원도 양구, 화천에 있는 사명산 (1,197미터)를 산행 하려고,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부평 산악회 버스에 몸을 싫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날씨는 쌀쌀하긴 해도 산행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오랜만에 맑고 신선한 공기 마시며, 강원도 최전방 산하를 조망하며 산행하는 생각을 하니 절로 신바람이 난다. 갈길이 머니 차창가에 기대어 부족한 잠을 청해 보지만, 일행의 환담 소리에 잠들기가 쉽지 않다.

 

부평에서 6시 출발하여 5시간이나 달려 사명산 들머리에 도착하니, 예정 시간보다 1시간이나 늦게 11시에 도착을 했다. 서둘러 하자마자 입산 표를 끊으려니, 뜻밖에 1115일부터 산불 예방강조기간이 되어, 입산통제를 하기 때문에 산행을 못한다고 한다.

 

세상에 그런 줄도 모르고 첫 새벽 일어나 5시간이나 걸려 달려왔는데, 이게 뭔 낭패란 말인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만 입산을 안 시키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주차장에 등산객을 태우고 온 차량이, 한 대도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 상황에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만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산행지 변경도 안된다. 어쩔 수 없이 집행부에서 상의 끝에 결정을 내린다. 강원도 최전방으로 안보 견학온셈치고 평화의 땜과 통일전망대, 4 땅굴을 돌아보기로 하고 일행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전원 찬성이다. 그 바람에 안보 견학이 시작된다.

 

어쩔 수 없이 사명산에서 한 시간 반여를 달려 평화의 땜에 도착하니, 과거에 건설했던 평화의 땜보다 땜 두께를 더 훨씬 더 두껍게 보강공사를 하고, 땜의 높이도 20여 미터 이상 높게 보강 공사를 하고 있다.

 

한때는 이 평화의 댐 건설목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일부 정치 세력과, 환경 단체, 또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전문 꾼 단체들과 일부 종교계 전문 반대파들이 격렬하게 비난했던 사람 중 한 사람이었던 김대중이 어느날 대통령 되고 되더니, 그렇게 반대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서일까. 기존 평화의 땜 보강공사를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쉬쉬하며, 벌써 6개월 전부터 공사를 진행했다.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빨갱이 북한을 지지한 김대중이 평화의땜 보강공사를 하다니......,

 

그렇게 군사정권 전두환 대통령이 반공을 무기로, 국민 공포감 조성하며 성금 거둬 쓸데없는 평화의 댐 건설한다고, 어용단체들 앞장세워 날리 블루스를 치던 김대중이 이 뭔 괴상한 발상을 하는일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쉽지 않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선, 국민을 교묘하게 기망하며 선동 정치질을 아무렇치도 않게 하는, 무례한 위정자들의 행태에 침을 뱉어도 시원치 않다. 한마디로 보지 말어야 할 현장을 본것같아 입맛 씁쓸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만 그런걸까. 퉤퉤퉤 그러니까 위정자들의 행대는 속된말로 지눔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으로 몰아가며 국력낭비를 해도 된다는 이야기다.

 

개자식들이란 육두문자 욕설이 절로 난다. 얄팍한 정치인들 꼼수에 기망당한 국민 심정 너무 허무해, 차라리 이눔의 세상 우리 집 강아지 덕만 이는 믿어도, 야당 정치인(빨갱이지지) 놈들은 믿을 수가 없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평화의 땜 견학을 마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통일전망대와 제4 땅굴 견학을 위하여, 양구 도솔산 펀치 볼 지구 전적비가 있는 곳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후 2시다. 서둘러 주차장에서 점심을 먹고 제4땅굴 견학은 오후 4시 지나면 못한다는 군 당국의 설명이다.

 

우리는 서둘러 통일 전망대에 향해 오른다. 그런데 저 아래로 보이는 곳이 6.25한국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펀치볼이며, 세계에서 보기 드문 해안 분지 마을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분지마을 형태가 마치 우주인이 달 탐험할 때 보내온, 분화구 같은 모습과 흡사하다.

 

우리 일행을 싫은 버스는 고도를 높이며 꼬불꼬불 이어지는 강원도 특유의 경사길을 안전하게 잘도 오른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능선에 올라서니 철책이 보인다. 여기부터 민통선 북방 접적지역이라는 경고문이 보이며 긴장감이 감돈다. 버스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니 바로 전망대가 있고, 바로 코앞에 철책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그리고 그 철책 철조망 너머로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이 보이고, 북한군 GP가 보이는데 얼핏 보기에는 그런대로, 평화로운 모습같은데, 사실은 이곳이 우리나라 휴전선 지역에서 가장 긴장감 속에 상호 대치하는 중요 군사 지역이라 한다.

 

남과 북의 병사들은 일면에서 모두 형제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그 형제가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는 현실이 너무 가슴 아프다. 주적 개념이 아닌 형제 가족의 개념으로, 북한을 보면 그렇게 불쌍하고 가여운 생각이 든다.

 

나는 7살 때 6.25 한국전쟁으로 피난 나와, 14살인가 때 도민증을 발급받았다. 그런데 당시 마을 이장일을 보시던 외삼촌께서 도균이 너가 군대 갈때까지 남북통일이 안 되면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날것이라며, 내 나이를 두 살이나 줄여 도민증 발급을 받게 해셨다.

 

그런데 내 나이 60이 되었으니 6·25 한국전쟁 지난지 이미 반세기를 지났다. 그런데도 남북통일은커녕, 점점 더 상호 강력한 대치상황으로 견제를 하고 있다. 그슴 가슴 현실이다. 지금의 대치상황 이 상태라면 아무래도 내 생전엔 남과, 북의 저 철책을 철거하는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안타깝다. 우리 세대가 남, 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2세들에게 대 물림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 화나고 답답하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대통령인지, 북한 대통령인지 분별 되지 않는 김대중은 북한에 맹목적 퍼주기를 하며 노벨상에 눈멀어 있다. 기막힐 일이다.

 

이런저런 생각 하며 통일 전망대 견학을 마치고, 4시 전에 제4 땅굴까지 도착해야 땅굴 관람을 할 수가 있다. 그바람에 묵묵히 최전방 고지를 지키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병사들에게 음료수라도 전하주지 못하고 서둘러 돌아서는 마음이 안타깝기 짝이 없다.

 

시간에 쫓겨 간신히 제4 땅굴에 도착하니 350분이다. 10분만 늦어도 땅굴 관람은 불가능 했다. 도착 즉시 인솔 군인의 안내를 받아 간단한 주의 사항을 듣고, 우리 일행들은 땅굴 앞에서 카메라를 보관시키고, 340미터에 이르는 암반을 지름 2.5미터 정도 굴착 기로 뚫은 터널을, 도보로 걸어 견학을 하는 기분이 우울하다.

 

수백 미터 높이의 산에 공을 뚫어 땅굴을 발견하고, 이 엄청난 북한의 남침야욕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100% 암반구간을 터널을 뚫어, 관람통로를 만든 우리나라 건설사들의 굴착기술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무려 340미터나 되는 암반터널을 걸어 끝에 다다르니, 그곳에 북한군이 파 내려오다 우리 군에 발견된 북한군 땅굴이, 키가 작은 내가서도 일어서지 못하고 구부려야 할 정도 높이로 땅굴을 뚫어 내려온 현장을 본다.

 

여기서 부터는 일어서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모노레일을 타고, 고개를 숙인채 북한군이 파놓은 땅굴을 약 150m 정도 달리는 체험의 현장이 그야말로 경이롭고, 신비롭다. 정확히 북한군이 얼마의 거리를 파고 내려왔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힘들게 파내려오다. 우리 군에 발견되었을 때, ‘북한국 괴수 김정일이 얼마나 통곡을 했을까. 생각하니 통쾌하기 짝이 없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김일성, 김정일 그 일당의 세습체제 만행에 치가 떨린다. 만약에 내가 이나라에 대통령이라면 북한의 두 괴뢰정권괴수들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알려, 지구상에서 북한을 더 이상은 발붙이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15분 정도 땅굴 견학을 하고 나오니, 땅굴 바로 옆에 忠犬之墓라 쓴 묘비가 있고, 용맹스런 개의 흉상을 청동으로 조각해서 세워놨다. 이상하다. 왜 여기에 개의 충견 비가 있는 것일까. 의아해 하며 충견 비문을 읽어본다.

 

내용이 다음과 같다. 우리 군이 기르고 있던 군견이 북한군이 설치하여 놓은 지뢰를 탐지하고, 군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으로 지뢰를 터트려, 우리 군인의 생명을 보호하였다는 내용의 비문이다. 그 비문의 내용의 글을 읽으며 나는 새삼 충견 헌트에 대한 감동에 눈시울을 적신다. 아래에 충견 비문을 소개 한다.

 

적이 파놓은 땅굴을 소탕하기 위하여 군견을 앞세운 수색팀은 1990314일 자신의 목숨을 조국의 품에 맡긴 채 만행의 현장에 대한 작전에 돌입했다. 평화의 땅을 적화시키겠다는 북한의 흉계는 땅굴 벽에 써놓은 오직 혁명을 위하여라는 그들의 선동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 적의 유독가스와 지뢰매설이 예상되는 암흑 같은 갱도 내에서 수색팀은 군사 분계선을 불과 330미터 남겨놓은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다. 전방에 설치된 적의 장애물과 지뢰로 말미암아 수색팀이 일단 정지하자 훈련된 군견은 지뢰위치를 알려주려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질척거리는 수렁을 통과하는 순간 고막을 찢는듯한 폭음과 함께 군견은 적이 묻어놓은 수중탐지 지뢰에 의해 동일 12:05분에 산화 함으로서 대원들의 희생을 대신했다. 죽음으로서 장병의 생명을 구하고 영광된 조국을 지킨 군견을 충견이라 칭하여 여기에 묘를 세운다. “충견의 이름은 헌트.

 

땅굴 관람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우리 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도 아닌 개 충견 헌트가 자신을 불태웠다는 사실에 대해, 고마움과 충견 헌트의 희생정신에 마음속으로 깊이 명복을 빈다. 비록 말 못하는 개(충견 헌트)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 했는데, 이나라 정권은 개만도 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하며 거듭 충견 헌트의 명복을 빈다.

 

우리나라 동부 전선 최전방 견학을 마치고 생각한다. 아침에 사명산이 입산통제 되어 산행 못하는 것만 아쉬워 했던 내가, 너무 부끄럽고 속좁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덕에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지키며 비가 오나, 눈이오나 묵묵히 강원도 최전방 고지에서 말없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랑스러운 병사들에게 감사의 머리를 숙인다.

 

내친김에 나홀로 초병 근무를 서고 있는 병사에게 다가가, 자네들의 덕택에, 우리가 후방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니, 초병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전혀 고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군 복무 할 만하다는 말을 하며, 오히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는 초병의 미소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이란 위인 김대중은 어떻게 무슨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노벨상만 타기 위해 자나깨나 개꿈만 꾸고 있으니, 장차 이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갈지 걱정이 태산이다.

 

사명산 : 높이 1,198m

소재지 :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사명산 1198m는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과 화천군 간동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 1,198m. 태백산맥의 줄기인 내지산맥(內地山脈)에 속하는 산으로 서남쪽에 죽엽산(竹葉山, 859m), 동남쪽에 봉화산(烽火山, 875m) 등이 솟아 있다.

 

동쪽 사면에는 양구읍 동수리·정림리·안대리·학조리·공리 등의 지역을 포함하여 약 8㎞ 이상에 걸친 대규모 산록완사면이 형성되고 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양구읍이 발달하였다. 석현리에는 소양강댐에서 양구 사이를 운행하는 선착장이 있고, 서쪽의 운수현(雲水峴)을 통해 남쪽의 추곡(楸谷)과 북쪽의 운수골이 이어진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면 과거 가뭄이 극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가물 때는 현에서 36리 떨어진 산정부의 못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과 싸운 전쟁터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사명산 정상에 오르면 춘천·화천·양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즉, 소양호(昭陽湖)와 파로호(破虜湖)가 한눈에 보여 장관을 이루고, 가을에는 오색단풍이 각양각색의 경치를 이룬다 하여 사명산의 풍광은 양구팔경(楊口八景) 중 제1경으로 꼽힌다.

 

일명 펀치볼 분지

 

자그마치 남북으로 11.95 킬로미터에 동서로는 6.6 킬로미터이며, 총면적이 57.5 제곱킬로미터나 되는, 해발 450미터에 있는 분지다. 이곳은 6·25 때 격전지로서, 그 생김새가 화채 그릇을 닮아 유엔군 병사들이 '펀치 볼'이라 불렀다고 한다. 특히 이곳은 광복 후 1953년까지는 북한 치하에 있었으나, 수복되고 1956년에 150여 가구가 처음 들어왔고, 1972년에 다시 100여 가구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한다.

 

이 분지는, 조선 중기까지 해안(海岸)으로 불리었다 옛날에 이 지역에 무척 뱀이 많아 지나가던 스님이 돼지를 기르면 뱀이 없어질 거라는 말을 듣고 그대로 따랐는데 돼지가 뱀을 모두 잡아먹어 뱀이 없어졌다는 뜻에서 해안이라 불리게 되었다.

 

뱀과 상극인 돼지의 뜻을 지닌 해안(亥安)으로 바꾸어 쓰게 되었다고 전한다. 원래, 이곳은 호수였다고 한다. 가칠봉 능선에서 뱃조각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또 대암산 능선에서 다슬기껍질을 발견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이 호수는 한동안 물이 괴어 있다가 산세가 낮은 동쪽 기슭이 터지면서 물이 흘러나갔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개구부(開口部)로는 분지를 둘러싸는 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모여서 흐르고 있다. 이 물은 곧 서화천(瑞和川)을 이루다가, 인제 북방의 다른 개울과 만나 소양호(昭陽湖)로 흘러든다. 학자들은 이 해안분지의 생성에 대해서 두 가지 학설을 내세우고 있다.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0만여 년 전에 지름 188미터, 무게 2,700만 톤 정도의 운석이 음속(音速)의 200배 속도로 떨어져서 이 분지가 이루어졌다는 학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위의 산줄기는 변성암의 일종인 편마암인 데 비해, 분지의 바닥은 비교적 풍화 침식이 잘 되는 화강암이어서, 이 두 종류의 암석이 적어도 2억 년 동안 차별적으로 침식되어 생겼다는 학설이다. 이 중에서 차별 침식으로 보는 학설이 더 지배적이다.

 

침식분지 형성 원인

 

침식분지는 하천의 합류 지점이나 화강암의 국지적 분포에서 암석의 경연차에 의한 '차별 침식'으로 형성된다. 즉, 중생대 화강암의 관입 이후 오랜 침식을 받는 동안 주변의 편마암은 침식에 잘 견디고 화강암 지역은 더욱 침식을 많이 받아 형성된 것이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현리 지형도(좌)와 침식분지 지형의 형성과정 모델(우)·해안분지는 우리나라 침식분지 지형의 가장 모식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림의 중앙부에 있는 화강암이 주변 지역의 결정 편마암보다 침식에 약하여 움푹한 오목 모양의 분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 기반암인 결정 편마암계 위에 화강암의 관입이 이루어진 다음에 화강암이 주변부의 결정 편마암보다 침식이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최영선, '자연사 기행', 1995, 한겨레 신문사,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