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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설마리 전투추모공원
윤도균
2020. 7. 18.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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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 설마리전투추모공원
경기도 파주에는 안양 관악산, 개성 송악산, 포천 운악산, 가평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오악 중 하나로 불리는 감악산이 있다. 감악산 북쪽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그 왼쪽에는 적성면 중심부를 지나 임진강과 이어지는 설마천이 흐른다. 설마천이 흐르는 계곡과 임진강 주변은 6•25 한국전쟁때 대표적인 격전지 중 하나다.
그들(영국군)은 왜 생면부지(生面不知)인 대한민국을 위해 소중한 생명을 바쳤나?
이곳에서 국제연합군(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영국군 젊은이들은 생면부지(生面不知)인 대한민국을 위해 소중한 자신들의 생명을 바치고 산화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우리 나라를 구해준 유엔군,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참전용사들의 죽엄에 대한 감사는 나몰라라 하고, 국가와 국민의 철천지 원수인 북한과 떼놈 중국을 상전으로 모시지 못해 발버둥질 치는것 같아 안타깝다.
영국군 설마리전투추모공원
설마리 전투, 글로스터 고지 전투(Gloster Valley Battle), 또는 임진강 전투(Battle of Imjin River)는 한국 전쟁 중,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임진강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임진강 하류의 국제 연합군 진지를 공격하였는데, 이는 1951년 3월 수복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다시 점령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은 대한민국의 수도였던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임진강 지역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 춘계공세의 일부로, 춘계공세의 목적은 1951년 3월 유엔군의 성공적인 반격 작전 이후 유엔군이 38도선 북쪽의 캔자스 선까지 진출한 것에 맞서 유엔군에 잃은 영토를 되찾는 것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주로 영국군으로 구성된 제29보병여단에 의해 방어되었다. 29 보병 여단은 영국의 3개 보병 대대, 벨기에의 1개 보병 대대, 지원 전차와 포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투 중 영국군은 미군과 필리핀군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에 맞서 29 보병 여단단은 이틀간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기세는 무뎌졌고, 유엔군은 후퇴하여 서울 북부에서 방어를 준비할 수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1957년에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마지리에 영국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졌다. 임진강 전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영국의 대니얼 고든 감독에 의해 제작되어 한국전쟁 60주년인 2010년에 개봉되었다.
전투가 벌어진 유엔군의 구역은 영국 육군 제29보병여단이 맡고 있었고, 영국군 3개 보병대대와 벨기에 유엔 사령부 소속인 벨기에 보병대대 1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았다. 수적으로 병력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9보병여단은 3일 간 진지를 고수했다. 제29보병여단의 부대원들은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제29보병여단이 시간을 벌어준 덕택에 가평 전투와 같이 다른 지역에 있었던 유엔군은 중공군 공세의 추진력을 꺾을 수 있었고, 서울 북쪽으로 유엔군이 철수해 중공군에 대한 방어작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중공군은 서울 북쪽의 노네임 선에서 공세가 중단되었다.
"규모가 작더라도 전투의 흉포함은 전세계의 상상을 사로잡았다."[4] 특히, 글로스터셔 연대의 제1대대는 235고지에서 중공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이 고지는 글로스터 고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글로스터셔 대대를 비롯한 제29보병여단이 설마리 전투에서 보여준 저항은 영국 군사사와 전통의 중요한 일부분이 되었다.
이 비는 한국전쟁 당시 설마리전투에서 고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영국군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주변의 돌들을 채석하여 쌓아올리고, 상하 각각 2개씩 모두 4개의 비(碑)를 부착하여 만들었다. 위쪽에 있는 비 2개 가운데 왼쪽에는 유엔기를 새기고, 오른쪽에는 희생된 영국군의 부대 표지를 새겼으며, 아래쪽의 왼쪽 비에는 한글로,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하였다. 유엔군의 참전 상황을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위키백과 자료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