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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만 마리의 나비때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이외수 "얼음방"> 중에서

윤도균 2020. 5. 2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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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강화시킬까를 모색해 보았다. 밥이 떠올랐다. 일찍이 밥만크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나는 한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얼음밥으로 끼니늘 연명하면서 묘사적 문체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해 있었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엇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망치와 못을 이용해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끼이었다. 한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으면 1주일은 족히 정신과 내장을 투명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글 한 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원지에다 옮겨 보았다.

 

수천만 마리의 나비때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단 한 줄이었다.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 추워서 방문을 닫고 방금 원고지에 옮겨 놓은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만약 한 줄짜리 시라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눈보라로 정한다면 역시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터, 나는 왜 그때 화장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혹시 얼음밥을 먹어가면서까지 묘사적문체를 얻어 내려고 발버둥치는 내게 하나님이 영감이라도 내려주신 것이나 아닐까.

화장터라는 제목을 붙이자. 나비떼는 놀랍게도 사자의 소지품을 태울 때 날아오르는 여노물의 사해조각을 연산시키더니 이내 영혼의 편린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목을 제지공장으로 붙인다면, 나비떼는 종이조각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원고지에 써넣은 나비떼는 곤충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눈보라가 될 수고 있었고, 사해조각이 될 수도 있었고, 종이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편린까지 될 수 있었다. 관측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 내가 빌려오는 사물들은 판이하게 다른 상징성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알았다. 불시에 막혀 있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고 있었다.

배반자로부터 보내온 설탕은 달지 않다. 결핵에 걸린 태양은 눈부실 수가 없다. 발가락이 자라는 조랑말의 당혹감, 구걸을 중단한 거지의 허영, 쥐를 보면 도망치는 고양이의 비애, 목이 짧은 기린의 절망,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순간 나는 만물들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면서 상싱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물의 외형이 주는 과정관념 대문에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난관은 극복되어 있었다. 세 솥째의 얼음밥이 비어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사물을 보는 시간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을 지키고 있는 굴참나무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 가 있었고, 끊임없이 얼음 밑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물의 도란거림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는 회색 하늘의 음모도 읽어낼 수가 있엇다. 나는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면서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만물의 영혼과 합일하게 되었다. 어느새 개떡 같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조차 모조리 소명되어 있었다. 아무리 개떡 같은 세상이라도 눈물겹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외수 <얼음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