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호태풍 ‘링링’이 휩쓸고간 삼성산 481m 산행

2019. 9. 8. 22:56☎청파산행과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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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태풍 링링이 휩쓸고간 삼성산 481m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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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태풍 링링이 휩쓸고간 삼성산 481m 산행

 

삼성산

'삼성산'은 서울특별시의 관악구 신림동과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걸쳐 위치한 산이다. 금천현의 진산(각 고을을 진호(鎭護) 하는 주산(主山))이며, 관악산은 지금의 과천시 관문동 소재 온온사가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5리 지점에 있는 과천현의 진산이어서 두 산이 별개의 산임을 밝히고 있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677)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정화시켜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불교계 일각에서는 불가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교주(敎主)인 아미타불과 그 왼쪽에 있는 관세음 보살 및 오른쪽에 있는 대세지 보살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는데 여기서 산명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산중에는 삼막사를 비롯하여 염불암, 망원암, 안양사, 성주암(서울) 등의 사찰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1592)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역임하고 후에 우의정을 지낸 백사 이항복(15561618)이 생전에 이 산에 올라 읊은 차유삼성산운(次游三聖山韻)이란 장시와, 일제강점기에 고백록(高百祿)의 시조가 전해진다, 또 일찍이 (900) 왕건이 금주, 과주 등의 고을을 정벌하기 위하여 이곳을 지나가다 능정이란 스님을 만나 안양사를 지어 오늘날의 안양시명이 탄생되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참조:안양시청]






























































































삼막사

 

삼성산(三聖山)에 위치한 전통사찰 제9호인 삼막사는 신라시대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후,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수하였고, 서산대사 (西山大師)등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지금으로부터 1300 여년 전인 신라 문무왕 17(677)에 원효, 의상, 윤필 등 세 스님이 암자를 지어 정진한 바로 그 위치에 삼막사가 지어졌다고 하며, 삼성산(三聖山)이라는 이름도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불상을 모셔 관음사(觀音寺)로 부르다, 사찰이 융성해지면서 도량의 짜임이 중국 소주(昭州)의 삼막사(三邈寺)를 닮아 삼막사로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삼막(三幕)으로 바뀌었다. 근대에는 지운영(池雲英)이 이곳에 백련암(白蓮庵)을 지어 은거하였고 현재 조선후기 건축양식인 망해루(望海樓)와 명왕전(冥王殿)(경기도 유형문화재 자료 제60)이 있으며 고려시대 삼층석탑(三層石塔)인 일명 살례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2)과 사적비(事蹟碑)(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125), 삼막사 남녀근석(男女根石)(경기도 민속자료 제3), 삼막사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94) 외에도 삼귀자(三龜字), 감로정(甘露井) 등 다수의 비지정 문화재가 있어 삼막사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안양 삼막사 남,녀근석


이것은 삼막사 칠성각 서북편에 있는 2개의 자연 암석인데 그 모양이 남자와 여자의 성기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남·녀근석이라 부른다. 옛부터 다산(多産)과 풍요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바위를 숭배했다고 하는데, 성기 신앙(性器信仰)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기 숭배 사상은 수렵 채집의 풍족과 풍농·풍어·다산과 무병 장수를 목적으로 하여 선사시대부터 행해져 왔으며, 고려·조선시대는 물론 현재까지도 무속·풍수 신앙·동제·미륵 신앙 속에 어우러져 이어지고 있다. 성기 신앙은 성기 모양을 닮은 바위나 기암 괴석 등의 자연물을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나무나 돌 등으로 성기의 모양을 그대로 만들거나, 은유해서 만든 석장승·돌하루방 등을 기원의 대상물로 삼기도 한다. 모두 복을 기원하고 다산과 풍작, 풍어를 비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이 삼막사의 남·녀근석은 신라 문무왕(文武王) 17(677)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삼막사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토속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했다고 하며, 이 바위를 없애지 않고 그 옆으로 칠성각을 둔 것은, 불교와 민간 신앙이 어우러진 우리 나라 민간 신앙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지금도 민간에서는 이 바위를 만짐으로써 다산과 출산에 효험이 있다고 믿어 4월 초파일, 7월 칠석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기원을 한다. 그 기원의 방법으로 동전을 바위에 문질러 붙이는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크기는 남근석이 높이 1.5m, 여근석이 높이 1.1m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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