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8. 09:08ㆍ☎청파의사는이야기☎
나는 "팔불출" 남편 글 : 청파 윤도균
지난해 가을 어느 날 시흥시 정왕동 1,000여평 밭에 고추와 들게를 심은 외사촌 여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오빠 어제 고추 끝물’을 땄는데 아직 싱싱한 풋고추가 주렁주렁 남았고 들깨도 수확기 되어 깻잎을 따도 되는데 ‘오빠 시간되면 오셔서 풋고추랑 깻잎’ 따 저림 해서 두고 드시면 좋을 텐데, ‘오빤 늘 바쁜 분이니 시간 내기 쉽지 않지요?’ 하는 전화를 받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고추저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동생의 말 듣기 무섭게 벌써 입에서 군침이 돈다.
‘근데 경희 엄마야 문제가 있어.’‘오빠 왜요? 무슨 일 있어요?’‘아녀 그런 건 아니고 다름이 아니라’ 아 글씨 이놈의 ‘도영이 할 망’이 나하고 도영이 만 남겨두고 “9박 11일간 유럽 여행”을 떠났으니 나도 가서 고추랑 깻잎 따오고 싶은 생각 굴뚝 같은데 이제 초등학교 5학년 손자놈을 두고 온종일 가 있을 수가 없네, 하니 ‘오빠 그럼 일요일’ 오면 되잖아요. 이렇게 해서 급조된 ‘풋고추, 깻잎’ 따기 모임은 내친김에 남동생, 여동생부부, 와 수지에 사는 외사촌 동생 들을 불러 모으니 자그마치 10여 명이 모여 고추를 따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슨 고추 따기 시합이라도 열린 것처럼 고추밭 한 이랑씩을 타고 앉아 고추 따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일은 이렇게 모처럼 친족이 모였으면 가을 이라곤 해도 아직 후덥지 근 한데 ‘오빠 한 잔하시고 땁시다.’ 하며 막걸리 한잔 권하면 어디가 덧나는지 어떻게 된 동생들이 눈치 없이 고추 따기에만 혈안이라 어쩔 수없이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배낭에 넣어간 막걸리와 안주를 내놓며 한 잔씩 돌리니 졸지에 마치 “가족 소풍”이라도 나온 분위기가 되어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고 그러다 보니 어영부영 빈 막걸리 병이 10여 개나 고추밭 이랑에 나뉭군다. 그러자 적당히 얼쩡해진 동생들 그때서야 비로서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이어지며 이건 고추를 따는건지 산보를 나온건지, “왁자지껄 갈팡질팡” 분위기 속에 서녁 하늘에 노을이 질 무렵 작업을 마치니
풋고추와 깻잎이 각기 한부대씩 두부대나 되는 것을 집에 가져와 거실에 쏟아놓으니 그 양이 어마 한데 문제는 이 손타는 풋고추와 깻잎을 여행 떠난 아내가 올때까지 그냥 두면 보나 마나 다 썩어 문드러져 버리게 될 텐데, ‘이놈의 노릇을 어찌 한단 말인가?’그렇다고 이 많은걸 갓 시집와 직장 다니는 작은 며느리를 불러 밤새 다듬자니 안 봐도 뻔히 답답할 것 같고, 에라 모르겠다. 두 팔 걷어붙이고 먼저 고추부터 다듬어 놓고, 깻잎은 차곡차곡 30여 장씩 묶음을 만들고 나니 어느새 날이 밝아 첫 새벽들이 막내 여동생에게 전화해 다듬어놓은 고추와 깻잎을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니 ‘오빠 우리도 밤새도록 그놈의 것' 다듬느라 꼬박 날밤 새웠다며 소금물 팔팔 끓여 큰 그릇에 붓고 풋고추와 깻잎을 담그고 무거운 돌 같은것으로 눌러 노란 말을 듣고 동생의 말 대로 소금물 끓여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담고 다듬은 고추와 깻잎을 차곡차곡 채워 넣고 돌로 눌러 서늘한 베란다에 내놓고 나니 오전 10시다.
그 후 아내가 여행에서 돌아왔어도 시치미 뚝 떼고 풋고추랑 깻잎 따온 이야길 하지 않고 하루가 지날 무렵 아내와 여동생이 전화로 여행 다녀온 수다를 떨다 갑자기 아내가‘여보 당신 풋고추, 깻잎 따왔다며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 왜? 당신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지? 하며 소금물에 담가놓은 통을 보여주니 ‘우리 도영할망’ 세상에…. ‘이 많은 것을 어떻게 다 손질했냐며’ 당신 최고 남편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추켜세우며, 저려놓은 고추와 깻잎을 두 손질해 꺼내먹기 좋게 용기에 저장하며 하는 말 ‘내년 여름까지 당신 좋아하는 고추저림’ 두고두고 먹어도 충분할 것 같다며 좋아하는 아내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마냥 기쁘다.
그러더니 이 소리를 두 처제와 아내 친구들에게 ‘우리 도영이 할아버지’가 어쩌고저쩌고 하며 소문을 내는 바람에 “나 같은 남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일부 사람들”에게 어영부영 “팔불출”남편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분명한 나에 생각은 “팔불출이면 어떻고 조금 모자란 남편”이면 어떻단 말인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가재 잡고 도랑” 치고 내 좋아하는 고추 저림, 아내 좋아하는 깻잎 반찬 풍년이면 그만이지 쓸때없이 남자 체면 어쩌고 저쩌구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체면이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닌데, 하며 나는 오늘 아침도 아내가 정성으로 양념한 ‘시 큰 세콤’ 고추 저림 장아찌 맛에 공깃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고 활기차게 건강한 하루를 시작하니 마냥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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