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드는 장준하

2012. 8. 18. 16:16☎사람사는이야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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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드는 장준하

 

 

"이전의 조사관들은 잘 몰라서 봐주었지만 나한테는 안 통한다, 뱃속에 있는 창자까지 꺼내서 밝히겠다" 조사관은 피의자를 앞에 앉혀놓고 으름장을 놓았다, "너는 그 정보부원을 아느냐", "너는 정보부원이다", "네가 선생님을 죽이지 않았냐" 조사관의 협박이 이어지자 피의자는 노기를 띤 얼굴로 벌떡 일어서서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두 손의 뼈에 금이 갔다,


이 풍경은 박정희 시대의 안기부 밀실 풍경이 아니라 노무현 시대의 어느 조사실 풍경이었다, 피의자에게 '배 째드리는' 심문을 하던 조사관은 정보부 요원이 아니라 노무현 시대에 막강한 위세를 떨치던 의문사위원회의 조사관이었다, 심문을 받던 사람은 김용환씨, 장준하가 실족사할 때 현장에 있던 사람이었다,


김용환이 서울에 들렀다가 장준하 일행들과 약사봉 등산에 나선 것은 1975년 8월 17일이었다, 일행들이 점심을 준비하는 시간에 김용환은 장준하와 함께 정상에 올랐고, 두 사람은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름길을 택해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귀환하다가 장준하는 실족사했다, 김용환은 1967년 선거 때부터 장준하 선거 캠프에서 장준하를 위해 고생하던 장준하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장준하의 사망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김용환은 평생을 지옥에서 보내야 했다,


장준하 실족사를 본격적으로 의문사로 둔갑시킨 것은 1993년 3월에 방영된 문성근의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였다, 좌익정권의 시사 프로그램들이 방송이라는 탈을 쓰고 진실과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것에 앞장섰던 것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문성근은 장준하의 죽음을 타살로 몰아가면서, 수많은 왜곡과 조작을 서슴지 않았다,


문성근의 프로그램은 김용환까지도 왜곡시켰다, 목격자 김용환은 직업도, 사는 곳도 밝히지 않은 정체불명의 사람이었으며, 그동안 연락이 없다가 3년 만에 난데없이 하필이면 사고 당일 나타났다고 방송했다, 문성근의 방송은 장준하의 타살이라는 전제 하에 모든 상황을 꿰어 맞춘 것이었다,


문성근의 방송이나 민주당에서 주장하는 대로 장준하가 '타살'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뛰어넘어야 할 산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목격자 김용환의 발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때부터 김용환의 동지였던 사람들은 김용환의 등 뒤에서 비수를 겨누기 시작했다, 노무현 시대의 의문사 위원회도 김용환의 창자까지 꺼내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장준하 타살의 증거를 잡으려는 노력은 눈물겨운 것이었다, 수많은 취재와 증언, 마네킹 추락 시험, 헬리곱터를 동원한 촬영, 컴퓨터 시물레이션, 갖은 방법이 다 동원되었고, 김용환이 의문사위원회에 불려나가 조사를 받은 횟수는 무려 30회가 넘었다, 심지어 그의 아들과 친족까지도 의문사위원회에 불려나갔다,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다시 선거철이 다가왔는가, 요새 장준하의 시체를 다시 좌판 위에 올려놓는 의문의 세력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예전에 문성근이가 했던 것처럼, 장준하의 죽음에 새로운 사실이 등장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장준하 두개골의 구멍은 장준하가 실족사할 때 이미 밝혀진 내용이었다,


사건 당시 당직 검사였던 서돈양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되어 의사를 대동하고 밤 1시 쯤 현장에 도착했다, 장준하가 추락한 지점은 모래바닥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상태였고 시체는 깨끗하지 않았다, 의사는 후두부와 다리에 골절이 있다고 진단했다, 실족 추락하면서 머리가 깨지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좌익 역사에는 간간이 시체가 등장한다, '시체 장사'는 종북좌익들이 보여주던 주특기였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세력들은 그들이 존경한다던 선생님의 시체까지 사정없이 좌판에 진열한다, 다시 손바닥 뼈가 부러질 정도로 김용환도 분노할 터이지만 장준하도 분노할 것이 틀림없다, 심심하면 장준하를 깨우고 밖으로 불러내는 판이니, 그 정도 우려먹었으면 이제 그만 장준하를 쉬게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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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 두개골 함몰 사진 공개 "충격"

장준하 선생 두개골 함몰 사진 공개 "충격"
이윤성 서울대 교수 “뒷머리 둔체에 부딪힌 손상”… 민주통합당, 진상조사위 구성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이윤성 서울대 교수 “뒷머리 둔체에 부딪힌 손상”… 민주통합당, 진상조사위 구성

조현호 기자 | chh@mediatoday.co.kr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맞서다 1975년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부위가 지름 6×7㎝ 크기의 원형으로 함몰돼 있는 사진이 37년 만에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사진상으로 볼 때 뭔가 인공적인 물체(둔체·둔기)로 가격당해 타살됐을 가능성이 무게를 두게 하고 있다.

 

㈔장준하기념사업회(회장 유광언 전 정무차관)는 16일 오후 서울 광화문 사무실에서 대책회의를 연 뒤, 지난 1일 장 선생의 유해를 이장할 당시 찍었던 장 선생의 유골 사진과 14일 유골 검사를 한 이윤성 서울대 법의학 교수의 소견서를 공개했다.

 

지난 14일 작성된 이윤성 서울대 의과대 법의학연구소 교수의 소견서에 따르면, 이 교수는 지난달 25일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로부터 이장 예정인 장 선생 유골 검사를 의뢰받아 1일 약식검사한 결과, 장 선생의 머리뼈에는 뒤통수 오른쪽에 후두골(後頭骨·뒤통수뼈)과 오른쪽 두정골(頭頂骨·마루뼈)에 걸쳐 동그란 복잡-함몰 골절이 있고, 이 부위로부터 뻗어나간 기다란 형태의 골절(선상 골절)이 나타나 있다고 밝혔다.

 

또한 이 교수는 장 선생의 뒤통수 오른쪽 뼈에 생긴 골절의 경우 7×6cm의 원형이며 안쪽으로 함몰된 형태였을 뿐 아니라 여러 조각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부위에서 12시 방향으로 오른쪽 두정골을 거쳐 전두골(前頭骨·이마뼈)에 이르는 길이 18 cm의 긴 골절이 있었으며, 3시 방향으로도 오른쪽 두정골에 길이 12cm의 긴 골절이 나타나 있었다. 5시 방향과 6시 방향으로도 각각 길이 2cm와 1.5cm의 골절이 있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지난 1일 서울대 의대 이윤성 법의학연구소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이밖에도 오른쪽 관골(髖骨·볼기뼈, 골반뼈)은 적어도 4조각 이상으로 분리됐으며, 함께 골반을 이루는 천추(遷推, 엉치뼈)와 왼쪽 관골은 형태를 갖췄으나, 유독 오른쪽 관골만 불규칙한 형태로 분리된 것으로 미뤄볼 때 살아있을 때 생긴 골절(생전 골절)이라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장준하 선생의 사망원인에 대해 “머리 손상(머리뼈 골절과 그에 수반하였으리라 추정하는 두개내출혈이나 뇌 손상 등)로 본다”며 “머리뼈와 오른쪽 관골의 골절은 둔체(鈍體·둔기·blunt object)에 의한 손상”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 교수는 이 손상에 대해 “가격(加擊)에 의한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진을 보면 오른쪽 머리뼈에  7×6cm 원형의 함몰 자욱이 뚜렷이 나타나있다. 원형으로된 골절의 형태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망치 같은 둔기로 쳐서 생긴 현상으로 유족들은 보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당 차원의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장 선생 타살 의혹 규명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당 고위정책회의에서 당 차원의 ‘고 장준하 선생 의문사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키로 했다”며 “이제라도 박정희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 등 국가기관의 개입을 밝혀내고 책임자들의 분명한 사과와 국가 책임을 물어야 한다. 고인에 대한 정밀한 유골 감식 등을 통해 타살 등의 정확한 사인을 밝혀내고 당시 국가기관의 개입 여부에 대한 진실을 밝혀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일 서울대 의대 이윤성 법의학연구소 교수가 검사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